승부와 철학의 양 날개를 달아야 한다.

이색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부친이 쓰던 귀빠진 바둑판을 발견하고 잠시동안 허전하고 쓸쓸해 한다. 살아 계실 때는 잘 몰랐으나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새로운 것은 이색 같은 성인이나 우리같은 범인들이나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서유구는 꽃 피고 새 우는 곳에 초가삼간(草舍三間) 짓고 바둑 거문고를 방에 두고 혹간 찾아주는 벗을 기다리며 살고 싶다 했고, 장혼은 옥계시사를 만들고 바둑으로 친구를 삼기도 좋고 문학으로 친구 삼기 더 좋다고 말하고, 술과 바둑에 심취해 살던 서거정은 말년에 마포 강가에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

백년의 삶 쓸쓸하다/밤 비 강가를 적셔 옛 정취 떠오르고/말년에 은거한 고장 노래를 지어 보노라니/늙은 해오라비 신세 영낙없이 나로세.

유행가 마포 종점이 따로 없다. 20세기 서울 변두리를 살던 도시민의 애환이 조선시대 초기 사람의 그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서거정은 바둑을 보면 세상(정확히는 음양의 이치)의 이치가 있다고 했다.
경방은 상하사방고왕금래(上下四方古往今來)란다. 위아래 동서남북 옛것은 가고 새것은 온다는 것이다. 경방은 인간의 본능적 특징인 2세 창손의 법칙이 우주 안에 있다고 본 사람이다.

반고는 국필정방상지즉야(局必正方象之則也)라 한다. 바둑에 사상(四象)이 있다는 것이다. 기효신서 편찬의 산증인 척계광은 바둑이야말로 병법의 모든 것이자 우주자연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당현종은 이필이란 한 천재적 인물을 바둑을 통해서 발탁하여 중용한다. 현종이 바둑에 죽고사는 것이 있다고 묻자 이필은 사는 것에서 재주를 취하고 죽는 것에서 뜻을 취하면 좋다 답한다. 그렇다 세조는 바둑에 모든 것이 다 있다 했다.

범어에 차란가(chaturauga)란 단어가 있다. 원시적 바둑과 장기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성품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유길준은 파리를 견문한 첫소감으로 바둑판 운운한다. 조선의 관료의 눈에 비친 파리의 첫 인상이 바둑판 같다는 것이다.

얼마전 전남 함평에서 나온 한 묘지명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아프게 기록한다. 기록자는 유인태로 학생(學生)의 신분이다.

-우리 어머니 바둑 좋아하시어 형제들 바둑판 벌이는 걸 좋아 하셨지요. 일곱 남매 바둑판에 달라 붙어 있는 걸 보시고 창천의 별처럼 바둑판의 알처럼 번창하기를 바라셨지요. 한번은 오십리 길 외가에서 쌀 몇 말 얻어 오시며 온 몸에 땀내 풍기시면서도 책을 펴든 나에게 막내 바둑 한 판 두어 주라시던 어머니 김씨, 지금 어디 계신가요.

혹자들은 우리나라에 기록문화가 부재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지극히도 무지한 말이다. 정확한 말은 기록은 있으나 이용할 줄을 모른다는 말이 정답이겠다. 자신들의 무지를 조상 탓으로 돌리는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세상이 작금의 한국의 지성계(?)다.

오늘날 규장각과 학술기관 전국의 각 대학의 서고 등에 보관되어 있는 고서적 고기록이 350만 건 정도로 추산된다. 그중에서 한역된 것이 불과 천여 종이다. 초서로 된 것은 아예 제대로 한역된 것이 없을 정도다. 난중일기마저도 백프로 한역이라 자신하지 못할 정도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우리 선조들은 바둑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 오늘날 한역된  거의 모든 한적들마다 바둑에 대한 언급이 한두 점은 나오는 것이 증거다. 혹자는 기보가 없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 조상들은 바둑의 기보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바둑을 대하는 관점이 승부를 다투는 곳에 있지 않고 바둑이 담아내고 있는 승부 외적인 담론에 더 관심이 많았던 탓이다. 그러나 기록 속에 '대소철망' '권렴번' 등 기보집이나 사활집을 의미하는 바둑책들이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전혀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바둑이 아시안게임의 한 종목으로 진출을 했다. 바둑의 밝은 미래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둑이 명색만 스포츠인 비인기 종목의 한 종목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바둑이 승부의 다툼 속에  문화적 철학적 역사적 기반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절실하다. 도대체 이 일을 누가 할 것이며 누구의 책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