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죽을 날 기다리기.

프로기전의 '64강 상금제' 시행을 주장한 유창혁의 발언으로 한동안 바둑계가 떠들썩했었다. 날로 악화되는 경제사정은 사회의 모든 부분을 움츠러들게 하고 그중 스포츠계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스포츠계는 어떤 종목을 막론하고 비명일색이다.

스폰서들이 손을 털고, 멀쩡하던 구단들이 하루 아침에 폐단을 하는 등 창단보다 폐단하는 팀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포츠로 방향을 잡고 한발 들여놓은 바둑계의 행보도 다급해졌다.

지난해 한 대기업을 비롯 몇몇 중소기업에서 새로운 프로기전의 창설을 놓고 상당한 진척을 보이다가 모두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을 접게 된 이유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프로기전을 검토한 결과 '고비용 저효율'이란 것이다.

비용에 비해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비용만큼 광고 효과가 없다는 것이겠다. 특히 광고 효과 면에서 제로(?)에 가까운 예선전의 경비와 한국기원, 주최사 등이 주관비 운영비 따위로 소진하는 경비 들이 이해불가였던 모양이다.

3억5천 규모의 대회가 주관비, 주최사 경비 등으로 30퍼센트가 잘려 나가고 수백명의 예선 참가자들의 대국료가 추가되면 3억5천이란 규모는 말부터가 무색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창혁 9단의 64강 상금제를 시행하자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유창혁의 이 발언은 신선했다. 엄청난 팬들의 성원과 격려는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했고 실감했다. 그러나 유창혁 9단의 이 주장은 더이상의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기사들 자신이다. 

그러나 동료 프로기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젊은 기사들은 무관심했고, 일부 노장기사들은 한국기원 사무국(사무총장 한상열 5단)에 항의를 쏟아부었다. 한국기원 상임이사(유창혁 9단)가 어찌 그럴 수 있나. 이사직을 사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창혁 9단은 “최고의 칭찬도 들었지만 더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욕도 많이 먹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박치문

유창혁의 이 주장에 동조를 기대했던 비교적 젊은 기사들마저 침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다. 거기다가 한국기원에 대고 유창혁을 상임이사에서 퇴진을 시키라는 요구를 하는 기사들이 있다니 놀랄일이다.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마저도 이 논쟁에서는 한발짝 물러나 있다. 두 사람 다 '맞는 말인데 아직은 시기상조다(월간바둑, 주간바둑신문 인터뷰)'라 말하고 있다.

아직은 시기상조란 말은 10년쯤 후에 생각해볼 문제라던 천풍조 8단(월간바둑)의 말과 같은 말이다. 이쯤되면 절대 다수의 프로기사들의 마음은 '변화불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둑이 스포츠란 말에 동조가 안된다. 스포츠가 되어야 바둑이 산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스포츠라며 끝내 바둑을 스포츠로 끌어다 놓고 환갑 넘은 선수들이 현역에서 뛰는 희한한(?) 일은 더욱 이해불가다.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자고 나선 사람이 유창혁이다. 팬들은 그래서 유창혁을 성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창혁 9단의 이같은 주장은 그저 개인적인 주장일 뿐 한국기원의 정책으로 채택되기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안이 채택되더라도 투표를 통한 다수 프로기사의 지지가 필요한데 그게 언제일까.

무엇보다 한국기원엔 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없다. 젊은 기사들은 무관심하고 중견 기사들은 변화의 회오리를 두려워하며 침묵하고 있다. 노장 기사들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복지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기 앞에서 바둑계는 오히려 불신이 증대되고 있다. 코 앞에 닥친 위기도 위기지만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기인지 모른다. -박치문

박치문의 이 말은 사족이 필요없는 오늘의 바둑계의 모습이다. 스포츠 선수회(會)라기보다는 이익단체에 가까운 프로기사회의 오불관언은 거의 절벽 수준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 말을 '병입고황'으로 이해했다 .병입고황은 병이 이미 깊어 비장과 폐까지 미친 상태로, 더는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삼십 년 바둑계를 지켜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 왔던 대기자(大記者)의 처방전이기에 더욱 심각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