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有遊女 不可求思 (시경)

초사에 산귀(山鬼)라는 노래가 있다. 산귀는 산에 사는 귀신이란 뜻일진대 머리에 꽃 한송이 꽂고 들꽃 만발한 산길을 산보(山步) 하는 여자라면 살짝 맛이 간 여자일 것이다. 그렇다 산귀는 접신(接神)을 기대하던 여자가 부른 노래다. 고대(古代)의 한때 접신을 바라며 몸과 마음을 아파하던 여자는 이렇게 노래를 지었다.

ㅡ 한 사람이 산기슭에 넝쿨옷을 입고 풀로 만든 허리띠를 하고 서 있지요. 다정한 눈길, 고운 미소, 당신은 나의 이런 모습을 사랑하지요. 붉은 표범 타고 무늬 고운 승냥이를 거느리고 향나무 마차를 타고 계수나무 깃발을 단 당신. 좋은 옷 허리띠 새로 매고 향기로운 꽃 꺾어 당신께 주고 싶어.

나는 대나무숲 깊은 곳에 살고 있어, 온종일 하늘을 볼 수 없고, 길은 험난하여 오고 가기 힘든데 홀로 산 위에 오두막히 서 있으면 구름만 산 아래로 흘러간답니다. 어둡고 깜깜하여 한낮이 밤 같아라. 동풍이 불어와 신령한 비 내리니, 당신 기다리길 오래여라. 세월 흘러 靑春 다 지나가면 누가 나를 다시 아름답다 하실까요. 산곡에 지천한 풀 꺾으려니 바위는 첩첩 넝쿨은 갈등이구려.

당신 원망하는 마음 커 돌아갈 길도 잊었답니다. 당신, 그리도 시간이 없으신가요. 잠시 나를 볼 짬도 없으신가요. 이 산속에 사는 사람은 두견꽃 머리에 꽂고 돌 사이를 흐르는 물을 마시며 소나무 그늘에 산답니다.

당신 나를 기억은 하시나요. 그런가요. 천둥소리 우르릉 거리고 비는 자욱하게 뿌리는데 원숭이 소리 밤하늘에 들려오고 소솔한 바람 나무잎을 흔들면, 아 나는 당신 생각에 헛되이 가슴만 태운답니다.

조선후기 사람 이서구는 자신의 안빈낙도를 꿈꾸며 초사 산귀의 맑은 계곡물을 마시며 살고 싶다 했고 서유구보다 조금 먼저 사람인 허초희는 소나무 그늘 아래를 흐르던 계곡물에서 흰룡을 생각한다.


영롱한 꽃 그림자 바둑판을 덮고

한낮의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네

시냇가에 사는 흰룡을 내기 삼아

해지면 그 용을 타고 하늘로 가리.

(玲瓏花影覆瑤碁/日午松蔭花子遲/溪畔白龍新賭得/夕陽騎出向天池)

여류시인으로 허균의 누이로 유명한 허초희는 산귀속의 접신 이미지를 버리고 바둑을 꺼내 든다. 물론 산귀의 정서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접신 대신 도가의 사상을 살짝 바꾸어 든다.
허초희는 '유선사' 70여 수 중에 바둑시를 몇 편 남긴다. 동생 허균, 오빠 허봉, 스승 이달 등의 글속에 바둑 기록이 여러 편 나오는 걸로 보아 허초희가 바둑을 이해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허초희는 27살에 죽는다. 요절이라 할 수 있다. 시집을 간 여자가 27살에 죽었다면 문제가 있다. 혹자들은 허초희가 못생기고 불량한 남자를 만나 엄처시하에서 갈등을 하다 제명에 못죽었다는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한다. 그것도 연구라는 진지(?)한 장에서 말이다. 그러나 허초희의 남편은 못생기지도 불량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나 골치인 사람이었다. 그말을 허초희가 직접 말하고 있다.

生長長天里/ 女嫁得長天里/良人美容資/

人謂玉麒麟/一生耽遊獵/馳馬上峻返/恩愛何遷羞.

'유선사' 속에 있는 소년행(少年行)이다. 이 시는 남편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허초희 자신의 상사의 아픔에 다름 아니다. 

남편은 장천리 출신이다. 허초희는 그 장천리로 시집을 온다. 아름다운 청년이라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 남들이 남편을 옥으로 만든 기린이라 말할 정도다. 그러나 탐미의 버릇이 약점이다 사냥을 미친 듯 좋아한 모양이다. 말 타고 사냥을 가면 돌아올 줄 모른다. 도대체 사랑은 언제 할 거냐 묻고 있다. 실제로 허초희의 남편은 임진왜란의 전쟁에 나가 전사한 용사기도 하다.

이 시를 대하면 허초희를 둘러싸고 나오는 온갖 설(說)이 무색해 진다. 진실은 그것이다. 남의 집 규방일은 아무도 모른다. 허초희의 시가 아름답다 하여 그 남편이 응징(?) 받을 일은 아니다. 허초희는 진실로 남편을 사랑하고 좋아한 듯하다. 다만 자신에 머물지 않는 남편이 야속할 뿐이었다. 허초희는 자신의 고독을 바둑과 주변 사람들에게 달랜다.

쇠로 만든 가위를 잡으니

밤 추위에 열 손가락이 얼고

시집 갈 남의 옷을 지어주며

해가 바뀌어도 홀로 지내누나.

이웃집 여자였던 모양이다. 바느질로 생활을 하면서 나이가 차도 시집을 못갔다고 한다. 허초희에게 이 여자는 좋은 친구였던 듯하다. 신분 차이야 있었겠지만 허초희가 그런 걸 가렸으랴. 시집은 갔으나 독수공방인 여자와 나이가 차도 시집을 못간 여자와 만났으니 이심전심지인지감(以心傳心知人知感)이었을 것이다. 이 두 여인이 만나 밤을 새우며 무엇을 했을까. 혹시 바둑을 두며 황량한 여심(女心)을 달랬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난한 친구를 위해 허초희가 옷 몇 벌은 구입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