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풍운으로 비명(碑名)에 새긴 기록이며 흐르는 물 위에 그린 그림이다. 하여 역사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지만 기록으로 남은 역사는 순식간에 단절을 하여 화석으로 남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주변사에서도 이런 경우를 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요, 금이다.

요나라와 금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다. 거란은 우리 역사와 오랜 시간, 보폭을 맞추어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 살아온 민족이다. 거란족은 우리 역사에서 비교적 친화적이었던 말갈족과는 달리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거란은 요금이라는 제국을 중원 땅에 건국하면서 고려와 불편한 관계를 맺었고 충돌도 불사했다. 왕건은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킨 족속이라 하여 거란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기도 한다.

거란은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여 서경과 개경을 함락시킨 적도 있다. 역사는 고려와 거란이 마주친 최전선에 바둑을 등장시킨다. 그 유명한 강조의 진중 바둑이 그것이다(이 설은 필자에 의해 바둑이 아니라 '탄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강조가 진중에서 바둑을 두다가 거란군에 대패를 한 것이다.

이 당시 고려의 바둑은 굉장했다. 요나라에도 바둑은 있었다. 1977년 내몽고 '오한기백탑묘'에서 발굴된 13도 바둑판이 그것을 증거한다. 물론 당대 중국 고려 일본에 이미 19도 바둑이 퍼져 있는 상황에서 13도 바둑을 두었다는 점은 의문이기는 하다. 문화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흐르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하더라도 바둑에서 13도와 19도는 거의 10세기의 수준차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필자는 13도 바둑판이 사지(寺地)에서 출토된 것을 주목한다. 신라의 분황사 15도 바둑판이나 장락리 바둑편(片)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이다. 당대의 거란의 문인 '소관음'의 시를 보면 거란의 문화가 중국에 견주어 엄청나게 후진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위풍당당함은 만리 밖 남쪽을 제압하고.

동쪽 멀리 압록강 뒤흔들만하다.

대천 세계 괴물들도 다 간담이 서늘해지니 .

사나운 호랑인들 어찌 투항하지 않으리.

거란의 엘리트들은 문언문(文言文)으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거란은 중원을 통일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애를 쓰기도 한다. 소관음의 시 속에는 고려와 쟁패를 다투던 압록강 전투를 언급하고 있다. 송나라의 사신 '고경'의 '고려도경'에 오리의 벼슬처럼 푸르다 하여 압록강이라 부른다는 강이다. 이 시는 북방에서 말타고 도끼 하나씩 들고 씩씩대고 다니던 기마족의 호방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몽고의 시인 '살도자'의 호연지기는 압권이다.

한 세상 풍미하던 인간은 사라지고.

천고의 영웅도 풀밭 위에 누웠어라.

거란이나 몽고족은 북방의 기마족이다. 그들은 한곳에 거점을 두고 생업을 영위하던 고려 중국하고는 사상(?)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 속에 바둑이 녹아 있는 것은 고려 중국과 닮았다.

원의 쿠빌라이는 특히 바둑을 좋아하여 중원의 고수는 물론 멀리 고려에서 고수들을 불러 바둑을 두게 하고 감상을 하며 살았다. 고려의 고수 '설성경'은 쿠빌라이의 지시로 아예 원에 이주를 해 와 궁중에서 산다.

원이 금을 치고 중원의 패자가 되었을 때 금의 대신이었던 야율초재(1190-1244)는 금나라와 원나라에 만연했던 바둑을 염려하는 유언을 남기기도 한다.

- 위기의 서로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람의 심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나의 자손들은 마땅히 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야율초재는 원에 투항, 징키스칸의 원 건국에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 유언으로 바둑을 언급한 것은 당시 바둑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탐닉거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어쨌든 바둑은 고려 말갈 몽골 거란족을 가리지 않던 중국 동북방 전역에 퍼져 있던 '기예'였다. 일본 인도 월남까지도 포함되니 전 아시아적이라 하겠다.

이 중에서도 고려의 바둑은 단연 발군이다. 이 시대를 증언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고수는 오직 고려인들이다.

설성경. 곽희분. 조정통이 그들이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이 세계 바둑의 양강으로 군림하는 이유도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