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기림은 바둑의 정야사를 망라한 작가의 자유로운 바둑글 쓰기입니다. 회원들께서도 이점을 참작하셔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얼마전 한 문중의 소개로 서원의 서고에서 오래된 책을 한권 보게 되었다. 사서나 일역(日歷) 등 잡다한 책들 속에 끼어 있는 몇 쪽의 소책자였는데 향은초(鄕隱抄)였다. 별다른 책은 아니고 향은 선생이 홍주땅 남하리에 살면서 이런저런 일상을 기록한 12쪽의 일기장이었다.

시경과 주역에 대한 단상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 그 속에 바둑에 대한 언급이 있어 소개를 한다. 바둑에 대한 언급도 별 내용은 없는 것이나 이색과 이덕무 등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바둑이 요순이 만들었다는 것은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궁리가 모자라면 요순을 내세우는 버릇이 있다. 하도설도 타당치 않다. 바둑의 수가 기묘하기는 하나 하도와는 용체(用體)가 다르니 아무래도 바둑은 놀이의 신(戱神)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요즘은 문곡(文谷)과 바둑 두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시골 유학의 몰골이 구가 떨어진 바둑판과 다름 아니다.

향은은 이장찬(李章贊)으로 정조 순조 때 사람이다. 한산 이씨로 토정 이지함의 10세 손이고 호서지역의 유명한 문인인 김규오의 제자로 주역에 능해 통리군자(通理君子)라 불렸고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철종 때 '향현사'가 세워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고종때의 서원 철폐령에 걸려 폐쇄되는 영과 욕이 수년 사이에 갈리기도 한 인물이다.

향은은 향은초 몇 쪽과 호서지역의 문인들의 문집 속에 겨우겨우 이름이 전하는 잊혀진 사람이다. 향은초에 전하는 주역이나 시경 등의 단상은 별개 아니다. 통리군자라 부를만한 주역의 식견은 없고 바둑으로 문곡이란 친구와 소일한 내용과 그저 그런 일들을 기록한다.

바둑에 대한 생각도 색다른 것은 아니다. 요순설이나 하도설 등의 바둑의 기원설에 대한 신빙성 없음을 기록하고 있고 다만 놀이의 신이 만들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희신(戱神)이란 말도 중국의 적정록에 보이는 말이니 새로운 것은 아니다. 향은집에는 가난한 시골  문인의 몰골이 적나라하다. 페이지마다 가로 세로로 여백마다 낙서가 있다.

- 임자일 문곡 마른 명태 한 축, 종이 한 면.

어떤 날 바둑벗 문곡이 찾아와 마른 명태와 종이를 가져다 준 모양이다. 귀가 떨어져간 바둑판만큼이나 향은의 살림살이가 곤궁했던 모양이다. 조선 문인들의 문집을 보면 여백에 이런 글귀가 다반사다. 대원군 이하응도 청나라에 끌려 갔을 때 아들 면에게 보낸 편지 여백에 간장 된장 약간만 보내라고 적고 있을 정도다.

향은이 홍주 남하면(남양면)에 살 때는 다산 정약용이 금정도찰방으로 이 근방에 와 있을 때다. 다산의 '오서산기'는 이 시절을 기록한다. 다산은 청양을 지나며,라는 시를 남기고 있다.

가도 가도 첩첩 산골

베틀에 앉은 아낙의 시름 애닯구나.

다산은 오서산기에서 인근 문인 두 사람과 산행을 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그 두 사람이 향은과 문곡은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다산은 인근 봉곡사에서 성호 이익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참여를 한 바도 있고 무엇보다 다산의 주역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던 것도 향은과 친해질 수 있는 단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다산은 바둑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산도 말년에는 우호적인 바둑시를 한두 편 남기기도 한다.

다산의 주역사전에 향은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주역에 대한 식견은 소문대로 거창한 것은 못되었던 듯하다. 잡다한 바둑 거문고 등의 명인들의 기록에도 보이지 않으니 바둑의 수도 크게 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쪽 남은 그의 기록은 소중하다. 고절한 시골의 산수간(山水間)에 살면서 바둑이 있고 바둑을 두러 친구가 온다는 것...  공자는 이를 일러 유붕자원방래(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