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노미치시(尾道市)에 있는 본인방 슈사쿠(秀策, 1829-1862) 기념관에는 평소 그가 사용했다는 바둑판과 부채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부채에 슈사쿠가 썼다는 시(詩) 한줄이 주목을 끈다. [월간바둑] 최근호(5월호 '남치형의 일본바둑기행')에서 본 슈사쿠 부채에 써 있다는 시다.

전파양렴일평하처유휴성(戰罷兩奩一枰河處有虧成).

전쟁이 끝난 바둑판 위에는 이기고 진 상처 남아있지 않다는 정도의 이 시 구절은 백 마디의 말보다 슈사쿠의 바둑관을 잘 표현해 준다. 슈사쿠가 천재적 바둑기사로 전고(前誥)에서 바둑철학을 찾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한 노력도 엿보인다.

사실 위의 시는 원문은  아니다. 원문은 의외로 조선사람 이학규(李學逵 ,1770-1835)가 잘 보여준다. 출처는 '낙하생집'이다.

승부가 끝나고 각자 흑과 백돌을 통속에 쓸어 담으면 바둑판 위에서 무엇을 찾으랴.
(戰罷兩奩分黑白 一枰何處見輸贏)

이학규는 옛사람의 바둑관을 빗대어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바둑관을 말한다. 이학규는 자신의 바둑판에 기명(碁銘)을 새긴다면 다음과 같이 하겠다고 한다.

궁색함을 겉으로 보이는 것은 장부의 치욕이지만 바둑까지는 아니다(그럴 필요가 있나). 나무와 돌로 여기면 그뿐이다.
(簞食色見 君子攸恥 矧玆一推木石而已).   

슈사쿠는 전심전력을 말하지만 이학규는 지극히 한가하다. 바둑을 목숨으로 알던 사람과 그럴 필요가 없던 사람의 바둑관이 비교가 된다.   

이학규는 자신이 25년간 귀양살이를 한 경상도 김해 일대의 투전 바둑 등, 도박판의 폐해를 보면서 '바둑을 보며'라는 에세이를 짓기도 한다.

이학규는 바둑에 다섯 가지 금도가 있다고 한다.
'비수'가 있다고 하는 것,
자칭 고수라 하는 것,
흰돌을 다투는 것,
승부에 화를 내는 것,
남을 기망하여 승리를 하는 것이 바둑을 두는 데 있어 피해야 할 금도라는 것이다.

흰돌을 다투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말한다.

- 흰돌 잡는 것을 다투지 마라. 세상 말에 흰돌을 잡는 것이 고수라 하고 연장자가 흰돌을 잡는다 하며 서로 흰돌을 잡으려 핏대를 세우며 싸운다. 내가 볼 때 이기는 사람이 고수고 공경과 예의를 아는 사람이 연장자인(?) 것이니 흰돌을 잡는 것이 자랑이 아니다.
승부에 화낼 것 없다. 바둑은 본래 즐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화내고 바둑판과 돌통까지 내동댕이를 치며 눈을 부라리며 욕설까지 한다.

(勿爭執白 俗謂手高執白 又謂年長執白 甚有蹠輕抹口 低死爭執 余謂得勝者 爲 高手受人敬禮者 爲年長必不當以執白爲優也. 勿好勝喉怒 本爲韶遺 反興拂怒 甚有提坪撲樞)

이 내용은 오늘날의 인터넷 바둑을 고스란히 말하는 듯하다. 바둑을 두며 다투는 속성(?)은 역사 속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인가. 이학규의 이 문장은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이학규가 본 조선시대의 바둑은 시장판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간의 저쪽으로 한 발만 들여놓으면 우리는 옛 사람들의 바둑관을 만난다. 슈사쿠와 이학규도 그런 경우다. 이 두 사람이 한편의 바둑 시를 두고 만나고 있지 않은가.

슈사쿠가 거론한 바둑시를 이학규가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들은 60년의 나이 차와 조선과 일본이란 동떨어진 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하는 바둑관은 비슷하다. 다만 슈사쿠가 전고에서 흑백돌을 빼고 '휴성'을 집어 넣는 센스(?)를 보여준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 필자는 슈사쿠를 잘 모른다. 한국의 프로기사들도 잘 모르거늘 어떻게 일본의 기사들을 알겠는가.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던 슈사큐와 바둑이 생활의 지극히 일부분이었던 이학규의 마음가짐은 하늘과 땅이다. 슈사쿠에게 있어 바둑은  절대였으나 이학규에게 바둑은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바둑 시 한편을 놓고 조선과 일본땅을 살다 간 이질적인 두 사람의 접점이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