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체(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다'라는 사관(史觀)을 주장해 20세기 역사쓰기에 충격을 준 학자다. 크로체는 현재의 시각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검토하는 것이 역사라는 말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닌 평가하는 것으로 본다. 크로체의 역사관은 역사를 역사가의 주관적인 산물로 만드는 맹점은 있지만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당당하고 의연한 답변으로 손색(?)이 없다.

필자는 많은 역사가들을 책으로 만난다. '사서(史書)'를 읽고 사서를 각기 해석하는 역사가들의 시각을 곱씹어보면 흥미롭다. 그것이 독서의 즐거움이다. 얼마전 오래된 책 한권을 읽었다. 그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철학의 즐거움'이란 민병산(1928-1988)의 저작이다.

-역사는 흘러가지만 역사 속의 인간은 최초의 고대인처럼 처음부터 출발 한다. (1994년 신구문화사 발간)

민병산은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나 거리의 철학자등으로 불리며  바둑계에 일종의 기인처럼 알려진 인물이다.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나 철학 예술 바둑 등에 빠져 살다가 일종의 문화전설로 남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정도의 민병산의 평가는 무엇인가 아쉽다. 우리 문화의 대변자로 쓰기에는 어딘가 일프로 부족(?)하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존재였다 할까.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란 말은 구중관이 장난삼아 루항의 철인을 빗대어 시작한 말로 민병삼을 연구한 학자인 '이진섭'과 '이중연' 등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걸맞지도 타당치도 않다는 평가가 내려진 말이다.

필자는 민병산의 글을 읽고 역사학자 '카(E. H. Carr)'가 말한 '인간이 시간의 경과를 떠올리는 즉시 역사는 시작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민병산은 역사 속을 살다간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민병산은 역사 속의 사람들과 오늘의 사람을 동일시하고 그들 각자가 당면한 현실 타개를 역사의 발전으로 본다. '철학의 즐거움'의 독후감이 그랬다.

(돈황문서에서 발굴된 대승기신론소 필사본)

-민병산은 '원효'에서  '역사는 인물연구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민병산이 역사물의 생산자가 아닌 독후감이나 쓰는 감상자였다면 필자는 그를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병산은 '한국의 현대사'(전9권 신구문화사 발간)라는 역사물의 당당한 필진으로 자신의 역사관을 책임지고 있다. 그가 동국대학 사학과 출신으로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니 거리의 철학자니 못말리는 바둑마니아...등 그를 지칭하는 이미지에 가려, 바둑사의 마니아를 자청하는 필자도 아무런 생각없이 동조했음을 알고 입맛이 썼다.

민병산의 이미지는 80년 이후 민병산의 말년의 생에 해당하는 기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체로 바둑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가 관철동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바둑과 술(그는 술을 한잔도 못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잡문 기고로 생활하던 시절이 낭만으로 치부되어 굴절(희극화)된 그의 이미지에  동조해 왔었다. 왜(?)냐고 묻지 않는 글 읽기의 병폐다. 민병산은 '정석' '행마' 등 대여섯권의 바둑책을 출간했지만 그의 진정한 진면모는 백여권에 달하는 '전기물'이다.

민병산은 1960년 '새벽'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여 80년초까지 나폴레옹의 인생관, 소크라테스, 공자, 토마스 제퍼슨, 원효 등을 '새벽' '세대' '여성중앙' '자유공론' '금성출판사''신구문화사' 등 메이저 매체에 거의 백여 편의 전기물을 발표 또는 출간했다.

민병산은 인물연구를 꿈꾼 사람이다. 인물연구는 역사쓰기의 기초다. 그의 저작에는 민병산의 역사관이 녹아 있다. 그의 작품 '원효'를 찾아 읽고 필자는 민병산의 찰진 역사관에 빠져 들었다. 민병산이 대학 강단에 있었다면 일급 역사학자로 대단했을 것이란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아니 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전기물'을 온전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사회적 풍토가 진정한 역사학자 한 명을 매몰시킨 것은 아니지 의심스럽다. 기우(?)일 터이다. 민병산 자신도 이미 그리 될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 대개의 경우 가장 중대한 개성의 발전은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무명의 시대에 이루어진다. (철학의 즐거움)

민병산을 주목하자.
그가 바둑마니아였고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주변에 문인들과 낭만의 에피소드가 재미있다라는 신파(?)를 떠나, 시간 속에서 역사를 생각했기에 시대의 선각자로 군림(?)했던 사람으로 민병산 그 사람을 다시 검토하고 대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