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그분의 스승님이 실종되셨어요. 어림잡아 50여년은 족히 되나 봐요. 그 당시 송원장님은 천자문과 소학을 땐 학동에 불과했답니다. 사람들은 송원장님이 그분에게 사사했다고 알고 있지만, 점법의 오묘함은 허련 스승님에게 전수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친 거죠.”

“저기, 김말순이란 분도 송원장님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언니는 밖에서, 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탐지하거든요.”

“하필이면 이곳입니까?”

“점괘가 그러니까요. 수십 년 동안 하루하루의 파자점으로 생사를 확인했고, 점법에 의해 이곳에 계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이곳, 어딥니까?”

“역경원(易經院)이죠.”

“역경원?”

“확실하진 않지만 짐작되는 장소는 그 곳이에요. 거기에 측자 선생(測字先生)으로 불리는 노인이 있단 말을 들었거든요.”

“그곳에서 뭘 하십니까?”

“글쎄요.”

탁원제는 혼란에 빠져버렸다. 자신이 듣기엔 송나라 때 파자점으로 이름을 날린 소강절이란 점쟁이가 남긴 [황극서] 열두 권을 깨우쳤다고 했다. 어느 날 송학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잠적했다는 건 무얼 뜻하는가?

의문은 또 있다. 파자점 치던 점쟁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수십년 간 지낸 이유는 뭔가? 그 점에 대한 김순옥의 답변은 자못 진지했다.

“송원장님의 스승님께선 이곳으로 옮겨오시기 전 다른 곳에 구금되셨을 공산이 커요.”

“그건 무슨 말이죠?”

“이유가 있죠. 탁기자님은 남사고(南師古) 선생이 어떤 분인 줄 아세요?”

“그분은 중종 4년인 1509년에 경북 영양에서 나셨죠. 명종 때엔 종묘를 받든 참봉 벼슬을, 말년엔 천문 교수를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건 국립도서관에 들러 보세요. 그곳에 가셔서 남사고 선생이 지으셨다는 [격암유록(格庵遺錄)]을 찾아보세요. 그 책은 과거는 물론 미래에 대해 자세히 쓰인 예언서에요.”

“도서관에서 책을 본 적 있어요. 필사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것은 충남 어디에서 산다는 이모 씨의 필사본이에요. 1944년에 필사해 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돼있는데 기증 날짜가 1977년 6월 9일로 고서 번호가 1496이에요. 그러니까 1944년이든 그 이전에 필사 했든 해방 이전에 들어왔다면 당연히 조선총독부 직인이 찍혀야 옳다는 얘기죠. 그러나 총독부 직인은 없거든요.”

“그래요?”

“송원장님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세요. 남사고 선생의 종약회라든가 당시 자료를 뒤적여 봐도 [격암유록]이란 책자는 없다는 거죠. 있다면 고작 몇 페이지 분량의 비결(秘訣)이 전부였으니 이상하게 생각할밖에요. 그렇다면 후대의 누군가가 선생의 이름을 도용해 [남사고비결]을 [격암유록]으로 탈바꿈 시켰다고 유추할 수 있잖겠어요!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렇듯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요. 그와 같은 책을 만들려면 역학(易學) · 풍수(風水) · 천문(天文) · 복서(卜筮) · 상법(相法) 등에 뛰어난 학문이 있어야 해요. 그런 점으로 볼 때 [격암유록]은 송원장님의 스승 허련(許蓮) 선생의 솜씨로 추정하는 거죠.”

“무슨 이유로요?”

“그분이 아니고선 쓸 수 없는, 이를테면 상상할 수 없는 부분들이 등장 하거든요. 그걸 알아내려고 우리가 나선 거죠.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에서 어느 정도 증거를 찾았어요. 아쉽게도 확인하는 절찬 못 밟았지만.”

“도대체 김순옥 씨는….”

“정체가 뭐냐구요?”

“[격암유록]에 관한 것이나 또 전반적으로 말하는 거로 보아선, 그 방면에 상당한 전문 지식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고맙군요. 그럼 말해야겠네요. 저기요, ‘르포라이터’란 말 들어보셨죠.”

“르포라이터?”

“그게 제 직업이에요. 전 고아였어요. 송원장님에게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졸업했죠. 제가 고발기사를 쓴 걸 아시고 이번 일을 의뢰하셨어요. 굳이 타이틀을 붙이자면 ‘격암유록의 실체를 찾아서’겠죠.”

“소득이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결론은 뭡니까?”

“전 [격암유록]이 위작(僞作)이라고 봐요.”

“위작?”

“[격암유록]엔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 한일합방 · 남북 분단 · 육이오와 사일구, 오일륙 혁명 등도 수록돼 있어요.”

“저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뿐 아니죠.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패망, UFO의 등장, 스타워즈 그리고 종교전쟁까지 나오죠. 450여년 전에 쓴 예언서가 틀림없다면 참으로 대단한 거죠. 그치만 내용은 예언이 아니라 기록일 뿐이에요. [격암유록]은 기록문학의 적확성(的確性)에만 값어치를 부여할 수 있죠.”

그녀는 말을 끊고 두 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감쌌다. 탁원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깊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