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티브이 수신기를 빙글빙글 돌려 빼더니 그 윗부분에 위성 안테나를 꽂고 티브이 사이클을 4에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티브이 밑에 깔린 브이티알 스위치를 올렸다. 화상이 번쩍 일어나며 점점 밝아지더니 뜻밖에 옆방으로 들어간 박도식 일행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은 원룸 형태기 때문에 카메라 앵글이 피사체를 가까이 잡지 않더라도 방안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순옥은 두 가닥으로 나뉜 이어폰 잭을 phone에 꽂고 그 한 가닥을 탁원제의 귀에 찌르며 속삭였다.

“박도식이가 온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화면 속의 여인은 무척 화난 표정이었다. 그녀는 방안을 서성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 나 보고 어쩌란 거야. 경찰에 출두해 모든 사실을 까발리라는 거야 뭐야? 일은 자기네가 저지르고 이제 와서 나 보구 어쩌라구?”

박도식이 답답하다는 듯 핀잔을 줬다.

“그러니까 내가 누님한테 그랬잖어. 잘못하면 죽 쒀서 개 좋은 일 한다구. 어쨌든 신문 보니까 안됐습디다. 문사장이 그리 험하게 갈 줄 누가 알았소.”

“그딴 소리 그만둬. 정이 있어 결혼한 게 아니잖아. 나야 각본대로 움직였지. 고 여우 같은 장은미란 년이 이쪽저쪽 다니며 정신없이 냄샐 피워대더니 이게 뭐야. 공은 그년이 세우고 우린 기껏 수배나 받구.”

“수배는 무슨 수배라구 그래요. 유산을 누님 앞으로 해놨으니 경찰 쪽에선 궁금한 거죠.”

“그나저나 미야타(宮田) 부장은 뭐해. 날 이 꼴로 만들었으면 뒷감당이라도 해야지. 정말 못 봐 주겠네. 그리구 잡지사 박부장인가 하는 그친 왜 죽여? 죽일 것까진 없잖아!”

“그건 우리가 손 안 썼어요. 아마 문사장이 했겠죠. 그나저나 누님, 지금 그 자식 걱정하는 거유. 연습게임 한 판 치르더니 정 들었수? 나 원 차암, 하긴 뭐 그래두 상관있나. 삼남에 있는 수만 평 땅이 누님 것인데.”

“그래봤자지 뭐. 위자료로 받아 송곳 하나 내 맘대루 꽂을 땅은 아니잖아. 모두 다….”

“에이 그만 둡시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났으니 화끈하게 몸 한번 풉시다.”

“가만있어 봐. 아이, 저리 좀 가라니까. 어머, 어머! 얘좀 봐. 증말 못 말리겠어.”

박도식의 짓궂은 공격에 그녀는 마지못해 허물어졌다. 화면 속으로 눈길을 붙박고 있던 탁원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화면 속 여인이 내뱉은 말, 그것은 분명 박일우 부장에 관한 일이었다. 서둘러 티브이 전원을 내리고 이어폰을 뽑은 김순옥의 귀엣말이 나직했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그녀는 평상시에 쓰던 어투로 돌아왔다. 도청기가 있는 쪽을 향해 목청을 돋우었다.

“어머, 손님두 참. 절 지명해 주신 건 고마운데요. 너무 성급하잖아요. 어머머머, 그러지 말아요. 저도 하루 종일 일했더니 땀을 많이 흘렸다구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요. 아셨죠?”

그녀의 눈짓을 받은 탁원제가 박자를 맞췄다.

“목욕부터 한다구? 좋아, 그럼 나도 할 거야. 함께 목욕해서 나쁠 것 없잖아.”

“어머머머, 이 아저씨 좀 봐. 남녀가 유별한데 함께 목욕해요. 여기는요, 예의와 질서를 존중해요. 그러니까 막말 써서는 안 돼거든요 막가파 아니죠, 아저씨?”

끝까지 우기던 김순옥이 사내의 집요한 요구에 응해주자, 도청하던 감청실 우석만(禹錫滿)은 코웃음 날렸다.

“썩을 년, 꼴값 떠네. 그나저나 저 자식 된통 걸렸어. 오늘밤 백여시한테 쌍코피 터지게 생겼구만.”

그는 105호실에 연결된 감청 스위치를 내리며 하품을 줄기차게 뽑아냈다. 피로가 눈가에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이곳 영빈관 구조는 충무로에 있는 파라다이스 모텔과 흡사했다. 거울 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치장된 대리석이나 구조물이 사람의 모습을 비쳐낼 만큼 면이 매끄러웠다. 그것은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타일을 대신한 대리석도 물 건너 온 것이 분명하고, 욕조며 샤워기에도 메이드 인 재팬이란 상호가 찍혀 있었다.

샤워기가 쏟아내는 물줄기 아래서 탁원제는 여인의 몸을 완상했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샴푸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어깨선을 타고 밀려 내리자 단단해 보이면서도 검은 빛을 띤 건강한 피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물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돌아서더니 물살의 세기를 약간 죽인 채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한손으로 흘리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죠? 물어 보세요. 여긴 안심해도 될 장소니까.”

“저쪽 방에 있는 분들은 누굽니까?”

“남잔 박도식이고, 여잔 이경실이예요. 모두 다 시미즈 그룹의 직원들이죠.”

“문치수 자살 사건의 하수인들이군요.”

“그걸 아셨다면 기자 자격이 있어요.”

“절 아세요?”

그녀가 쿡쿡쿡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살아남으려면 무얼 못할까.”

“네에?”

“일이 재밌게 됐어. 여기 온 목적은 이게 아닌데 엉뚱한 일에 휘말렸어요. 뭐 휘말렸다곤 할 수 없고, 뭐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족한 거지 뭐.”

그녀는 샤워기를 끄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한 손을 뻗어 탁원제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