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쥐와 고양이

10월 25일 오후 1시에 출발한 버스는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정읍(井邑)에 위치한 신도원에 도착했다. 휴게실에서 잠깐 쉬는 것을 제하면 별다른 차질 없이 단숨에 달려온 셈이다.

“난처하게 됐네만 나의 스승님을 찾아야 방책이 마련될 듯싶네. 일본 여인의 몸에 깃든 독극은 복수재접법으로 밀어내기엔 역부족인 듯싶어. 우암이 말했다시피 저 독극은 가볍게 다룰 게 아니야. 그러니 신도원에 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역경원의 측자 선생을 찾아보게. 그분이 필경 허련 스승일 게야. 그 분을 만나면 이종준(李鍾準)이 지은 ‘신선방’의 처방을 일러 받아야 하네.”

이종준이라면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이다. [태을자금단방(太乙紫金丹方)]의 효험이 뛰어나 연산군이 직접 시험해 보고 신선이란 언해를 붙인 것으로 독물을 제독하는 처방은 독보적이었다.

송학수는 길 떠나는 탁원제의 운수점을 쳐보았다. 떨어진 첫 자는 쥐 서(鼠)였다. 서는 자(子)와 같으니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여인과 동행(好)해야 한다.

‘여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인과 동행한다?’

괘사가 혼란스러워 다시 뽑아들었다. 이번엔 급(給)이다. 이것은 일인구사(一人口絲)로 파자된다. ‘한 사람의 입을 실로 묶는다’는 뜻이다.

길인가, 흉인가?

송학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도원으로 가는 버스가 목적지 도착을 30분가량 앞뒀을 때였다. 건너편에 앉은 삼십대 아낙이 이쪽으로 슬그머니 건너왔다.

“난 사당동에 사는 김말순 일임(一壬)이야. 우리 집은 태평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길초야. 처녀 보살이란 간판 본 적 있지?”

탁원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낙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어 대견하다는 것인지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시집 안간 노처녀라고 무시했다간 큰 코 다쳐, 명도점(明道占) 치면 무슨 맘먹고 있는지 다 아니까. 이봐 총각, 보아하니 형제자매 없는 외톨이 같은데 어떠셔, 나와 누님 동생 할 거야?”

“그러죠. 일임이면 바쁘시겠어요. 점집하랴, 일하랴.”

김말순의 얼굴이 발그레 졌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을 때 짓는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얼른 방향을 틀었다.

“참, 동생 이름을 몰라 어쩌지?”

“탁원제라 합니다.”

“탁원제? 에이 촌스러워. 차라리 탁구공이 낫겠다아.”

“편할 대루 부르세요.”

“하긴 그래. 이렇게나 저렇게나 번거롭기는 매한가지야. 그래도 토요일은 모든 걸 다 팽개치고 바람이래두 쐴 수 있으니 나만큼 행복한 년도 흔치 않아. 서방님 없다고 쓸쓸한 것두 아니고, 발 달린 짐승이니 서울이구 지방이구 맘대루 다닐 수 있어 좋구. 어디 그뿐이여, 이년 저년 맘대루 부릴 수 있어 그것두 좋구!”

사르르 눈을 감은 김여인의 눈자위엔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주름이 실낱처럼 얹혀 있었다.

“저기 누님, 한 가지 물어볼 게요. 조금 전 일임이라셨잖아요. 일임이면 권한이 어느 정도죠?”

“고작 열 명이지. 것두 몰랐어? 한 지역에 육임(六壬)이 있잖아. 모두 60명, 예전에는 교도들이 많아 걱정 없었는데 갈수록 방녀(芳女)가 줄어든단 말이야.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아다라시가 어딨어. 멘스만 터지면 저희들끼리 짝짜꿍 붙어 난리굿 피우는데. 그러니 일 하려면 어려움이 많아. 요즘엔 필요에 따라 보도 아가씨들을 쓴다니까.”

“손님 접대까지 하세요?”

“며칠 전 교령(敎領)이 뜨는 바람에 정신없이 보냈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라니? 신도가 교령의 지시를 따르지, 교령이 신도 말을 따른데?”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가방 안에서 두툼한 책을 꺼냈다. 표지가 [성경]처럼 가죽 천으로 싸여진 책은 [신도경(神道經)]이라 금박이 찍혀 있었다. 김여인은 책자를 주르르 넘겨 한 곳을 가리켰다.

“이거 봐. 신도 십이계(信徒十二誡)에 어찌 쓰여 있는지. 직제 편을 봐. 한 동(洞)은 육임이 관장하되, 일임은 각각 방녀(芳女) 열 명씩 둔다 했잖아. 그리고….”

“방녀는… 또 뭡니까?”

“뭐긴 뭐야, 처녀 교도지. 6개월인가 훈련을 받는다든가 그래. 내 밑에 그런 아가씨가 열 명 있어. 옛날엔 모두 직장 여성들이었는데 지금은 보도가 많아. 사실 보도 쪽이 다루기 쉽거든.”

김여인은 다시 경전을 짚어갔다.

“그러니까 뭣이냐, 동은 육임이 맡고 구(區)는 방주(方主)가 담당한다. 또한 시(市)는 교령(敎領)이, 도는 총령이 맡으며 전체는 종사(宗師)의 관활 아래 두되 본당엔 사대 호법(護法)을 둔다. 이런 정도야. 이제 알것어?”

“감이 안 잡히는데요.”

“그래, 그래. 그런 걸 깊이 알면 골 때려. 탁구공처럼 이쪽저쪽으로 튀며 그렁저렁 사는 거여. 그렇잖아도 복잡한 세상인데 무얼 따지고 어쩌고 해. 가만, 동생은 초행길 같은데?”

“그렇습니다.”

“하이구, 그래도 날은 잘 잡았네.”

“예에?”

“오늘 자정에 큰 행사가 있대.”

“뭔데요?”

“도착하면 알 거야. 그나저나 어쩐다, 이렇게 없는 동생이 생겼는데 축하 파티도 못하고. 이것 봐 동생, 이곳에서 나가면 한 번 찾아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대접 해줄게, 알았지? 가만있자, 팔자에 없는 동생이 생겼으니 선물을 줘얄 텐데.”

그녀는 은으로 만든 매화꽃 문양의 액세서리를 꺼내 탁원제의 점퍼 왼쪽 칼라에 끼어주었다.

“이건 행운을 줘. 신도원을 나올 때까지 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