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좀 살려 주세요. 저···, 살···려···주세요. 누구···없어요···.”

고통에 일그러진 절규는 이삼 분 동안 계속되다 점점 가늘어지더니 처음 상태로 돌아가 빈 테이프 소리만 칙칙거렸다. 스톱 단추를 누르며 박치수가 의견을 내놓았다.

“녹음 상태로 보아 도청(盜聽)이에요. 소리의 가깝고 먼 상태가 한결같잖아요. 수화기를 들고 통화를 시도했을 때만 녹음된 것으로 봐 이건 도청이 분명해요.”

“파라다이스 모텔은 일반 가정집관 달라. 특히 전화는 일종의 비상전화 같은 성격을 띠잖아?”

“그거야 일반적인 모텔수준에서 보면 그렇죠. 아끼꼬에겐 알려지지 않은 전화번호가 있었겠죠.”

그러고 보니 시경 상황실로 아끼꼬가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알려왔다고 했었다. 직통 전화번호와 함께. 그렇다면 얘기가 됐다.

‘흐음, 요것 봐라.’

낙서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끼꼬의 신상에 관해 부탁한 건이 나타났다. 의뢰자는 박일우였다. 약간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치수 쪽을 흘끔거리다가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윤강일은 일지를 쓰듯 요점을 정리해 두었다.

첫째, <한국의 무속학>을 연구하는 아끼꼬의 뒤에는 재일교포 하나꼬(월간 스캔들 잡지의 민우기 사장의 누님) 여사의 아들 야마다 시게루(山田茂)가 있다는 것. 아끼꼬의 석사 학위 논문은 <영(靈)의 비밀>이었는데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해 박사 학위를 획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이번 도청은 지난 6개월 전 야마다 시게루 씨의 부탁으로 이루어졌다. 그녀 신상에 위험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라는 데 의뢰자의 불안이 엿보인다.

셋째, 친일파 의원 문창배(文昌培) 의원 주위를 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낙서록에서 시선을 거두며 탁원제가 골똘해지자 박여사는 카세트를 가리켰다.

“두 분도 들어 알겠지만, 조금 전의 목소린 아끼꼬가 죽기 전에 남긴 거예요. 같은 내용이지만 이것과 똑같은 테잎이 내게도 있어요. 그걸 잠시 설명해 드리죠.

전 어려서부터 시력 장애가 심했어요. 우리나라에 시험용으로 들어온 라식 수술을 받아 회복했는데 그 전엔 곤욕을 치렀거든요. 밖에 나갈 때엔 콘텍트를 끼고 집에 돌아오면 안경을 쓰다 보니 수술을 받기 전까진 번거로웠죠.”

박여사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 내려놓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음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청각은 발달했거든요. 한때 티브이에서 일본 추리작가의 작품을 번안해 만든 ‘목소리’란 드라마가 있었어요. 시력이 보통 사람의 십분의 일 수준인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를 듣고 범인을 찾아낸다는 스토리죠. 주인공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여러 해를 지냈는데 우연히 남자 친구와 극장에 동행했다가 예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살인 사건의 주인공은 현재 인기배우로 탈바꿈한 연예인이라는 얘기죠.

저는 그 드라마를 보고 상당 기간 나름대로 훈련을 하게 됐어요. 일종의 청력 훈련이죠. 그런 얘길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이 없었는데 두어 달 전 라식 수술을 받기 위해 검진 받으러 갔을 때 거기서 윤선생을 만났거든요. 그 분도 시력이 좋지 않더군요. 휴게실 소파에서 잡다한 얘길 나누다 저의 예민한 청력에 관심을 보였거든요. 그 후 잊고 지내는데 오늘 이런 테잎을 보내왔어요.”

어쩌면 막연한 이번 일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박여사는 충족시켜 주었다.

“테잎을 듣다보니 녹음되어 있는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는···,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직 대학교수가 개인적으로 연구실을 운영하는 곳이에요. 과천에 소재한 역사문제연구소였어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은 누굽니까?”

“윤일경(尹一慶) 교수에요. 아마 동양대학교에 적(籍)을 뒀을 거예요. 제가 알아 본 바론 부임한 지 한 달도 못 됐나 봐요. 중국에도 잠깐 있었구 미국에도 체류했지만 주로 일본에 머무른 기간이 길더군요.”

비교적 꼼꼼히 조사한 흔적이 엿보였다. 동양대학교는 탁원제에겐 모교다. 모교엔 은사 윤석호(尹錫昊) 교수가 있었다. 전공은 고대사지만 근 · 현대사까지 두루 달통해 ‘국사대사전’이란 애칭을 받았었다.

윤교수의 강의는 특색이 있었다. 해묵은 강의 노트를 들고 그것을 빼곡히 칠판에 베껴내는 그 나이의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제자들에게 묻고 그 답안을 직접 강요하여 받아냈다. 이른바 ‘공자식’ 교수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