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야?”

힐끗 탁원제 쪽에 시선을 던지며 박치수가 뭔가를 흔들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엽서였다.

“이거 보세요.”

전통공예를 촬영한 예쁜 사진엽서를 건네며 박치수가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제가 들어올 때 그게 편지함에 있었거든요. 독자가 보낸 그렇고 그런 내용인줄 알았는데 내용이 너무 서정적이에요. 한번 보세요. ‘가을이 오면 편지를 쓰겠어요’라는 제목이 붙어 있네요.”

탁원제는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나뭇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떨어지고

허기진 줄기마다

남녘에서 불어 온 바람이

머물다 가면

가을은 그렇게 깊어 가고

그곳 어디에선가

당신과 내가

비오는 뜨락을 바라보고 있을

정취 깊은 풍경을 위해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사랑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겠어요

가장 아래쪽에 시를 쓴 날짜는 사흘 전이었다. 전통공예 사진 한쪽에 1978042501이란 숫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건 작년 4월 25일, 박부장님이 첫 번째로 보낸 엽서에요. 여기에 찍힌 숫자로 봐선 윤강일(尹康鎰)이 분명합니다. 그 사람 동대문에서 ‘삼호 심부름센터’를 운영하잖아요. 박부장님 일도 몇 번 거들었죠.”

“그 친구 시도 쓰나?”

“글쎄요. 처음 보는데요.”

흐릿한 형광 불빛에 의지한 채 뚫어져라 엽서를 내려다보던 탁원제의 눈에 불꽃이 일어났다.

“박기자, 방배동 카페 골목으로 가자구.”

“예에?”

“카페 골목에서 아파트촌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우원(雨園)’이란 전통 찻집이 있어. 그리 가자구, 거기가 ‘비오는 뜨락’이야.”

찻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일곱 시가 이른 시각이었지만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우원 찻집의 주인 박희숙(朴姬淑) 여사는 2층 유리창 가까이 앉아 탁원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쉰이 넘었지만 마흔 어림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을 매끄럽게 가꾸고 있었다.  작설차(雀舌茶)로 입안을 적시며 탁원제가 물었다.

“저희들을 기다렸습니까?”

“그럼요, 기다렸지요. 오랜만에 탁기자님 만나 얘기나 해보려구요. 한 달 전부터 윤선생이 가끔 술에 취해 여길 왔더라구요. 꽤 늦은 시간인데 찾아온 걸 보면 아마도 깊은 고민이 있었겠죠. 설마 연애하자고 왔겠어요.”

박여사는 찻잔을 들어 입안을 적시더니 뒷말을 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오늘 전화가 왔어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더라구요. 오늘 저녁 위험한 일을 하는데 자신이 일곱 시가 넘어도 연락 못하면 탁기자님한테 <낙서록>을 전하라구요.”

“낙서록? 그게 뭡니까?”

“일종의 방명록이죠. 술을 많이 마시고 이곳에 들른 날 윤선생이 낙서록을 남겼어요. 오늘 테이프가 왔기에 제가 안에 넣어뒀거든요.”

박여사는 표면에 ‘3’이라는 숫자가 양각으로 패인 작은 열쇠를 건네주었다.

“차암, 운이 좋았어요. 사실 그 열쇠는 없어질 뻔 했거든요. 윤선생이 왔다 간 후 실내를 약간 손질했어요. 예전엔 나이 드신 분들이 이곳에 오면 물건을 놓고 가는 게 많았거든요. 그래서 개인별 보관함을 만들었는데 윤강일 씨가 거기에 낙서록을 보관시켰다. 내부 수리하느라 그 보관함을 모두 뜯었거든요. 버리려구요. 그러다가 윤강일 씨 전화를 받고 쓰레기 창고를 뒤져 다시 찾아온 거예요. 휴게실 안에 들어가면 벽에 붙어 있을 거예요.”

탁원제는 휴게실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하는 일의 다양성 때문인지 낙서록의 겉표지엔 ‘구름’이란 제호가 써 있었고 녹음 테이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일단 테이프부터 틀어보았다. 바람소리와 함께 한동안 칙칙거리더니 희미한 신음소리가 잡음과 섞이었다. 그 소리는 연속적으로 누르는 전화 다이얼의 발신음 속에 묻혀 버렸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지 발신음은 연속적으로 계속되다 끊겼다. 잡음이 심한 녹음상태였지만 나중에 건 전화는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