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구 박사의 소견대로 동공이 열린 것은 죽기 전에 무엇을 보고 놀랐다는 것인데···, 아끼꼬를 죽음으로 몰아간 두려운 일은 무엇이었을까?’

몇 가닥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이 뒤섞여 몽타주를 이루었다. 자신이 몸담은 <스캔들> 잡지에 가십 기사를 탔던 인물은 줄잡아 쉰 명이다. 잡지사 경영이 어렵다보니 취재라는 명목으로 구린내 나는 부분을 들춰 찬조금 뜯는 바람에 크고 작은 원한을 사왔었다.

지난 봄, 사이비 기자 일제 소탕령이 내려 정보를 늦게 받았으면 딸려 들어갈 뻔한 일이 있을 때 탁원제는 물 건너 잠수 타자고 졸랐었다.

“부장님, 소나기는 피해 갑시다. 아직 출금(出禁) 안 떨어졌으니 해외 취재 핑계 삼아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몇 개월 쉬다 오면 쫑 칠 것 아닙니까. 잡지등록 취소되면 적당한 것 구해 상호 변경하면 되구···. 부장님, 우리에게 앙심품은 놈 한둘입니까. 그놈들이 집단으로 염병 떨면 우린 간다니까요.”

“그렇게 하면 소나기는 피하겠지. 수사선상에 올랐다면 시점이 문제지 잡혀가는 건 초읽기야. 것보다···, 며칠 전 중앙 티브이 방송국에 출현한 그 매국노 1호 장민호 말이야. 그 자가 무슨 일로 <한국의 무속학>을 연구하는 아끼꼬를 초청손님으로 불러 대담을 나누었지? 아무리 박사과정을 밟는다지만 한국에도 쟁쟁한 무속학 연구가들이 있을 텐데 말이야. 게다가 그 자리에 구로다(黑田) 그룹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잖아?

그 일 직후 아끼꼬가 스토킹 당했다고 스포츠 신문에 떠들썩했었지. 사실 여부를 떠나 예쁜 처녀가 스캔들 생기면 그것만으로 기사감이야. 들리는 얘긴 그 처녀가 정 · 관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고, 친일파 어떤 의원이 취재용으로 ‘도요타’ 자동차를 보냈다는 것부터 구린내 나잖아. 이것저것 정황을 보면 뭔가 숨겨진 가닥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내 생각엔 껀수를 건지면 그것으로 보호막을 쳐도 늦진 않아.”

큰소릴 쳤지만 막연한 구상이었다.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였던 부분들은 다가갈수록 정상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설명되지 않은 기대 심리 같은 걸 바란 것은,  아끼꼬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자신들의 보호막이 될지 모른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일은 전적으로 박부장이 맡았기 때문에 탁원제로서는 전연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건질 것은 없었다. 정례적인 스케줄에 따라 움직일 뿐 개인적인 돌출 행동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건 한 달이 지났을 때 검찰의 사이비 기자 단속에서 수사선상에 오른 자신들이 제외되었다는 걸 들었을 뿐이었다.

“학구열이 대단한 데다 학회 회원들과 움직이므로 개인행동하는 걸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는데, 얼마 전 중앙 티브이 방송국에서 <단군 신화>를 재조명한다는 얘기가 있더니 그녀가 동행 취재해 중국을 다녀왔단 말이야. 일본인이 우리 역사를 만지작거린다는 게 왠지 이상하잖아?”

아직도 박부장 말이 귓가에 쟁쟁한데 그런 재원(才媛)이 죽었다는 게, 그것도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했다는 게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죽음···. 그녀가 본 건 뭐였을까. 무엇을 보았기에 동공이 열렸을까?’

탁원제는 미적분의 고등수학을 풀 때처럼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죽음엔 애매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스포츠신문 취재기자의 말처럼, 모든 게 다 드러났지만 풀리지 않은 또 다른 실 꾸러미가 가슴에 얹혀 있는 느낌이었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는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삼류 주간지 <연예정보신문>의 이달호(李達鎬) 차장이었다. 연예가 소식 외에 얄망궂은 사건에 대한 정보는 공유한 상황이므로 이번 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이, 탁기자. 도대체 박부장 어디 간 거야? 중국이야, 일본이야? 어디로 튀었어?”

“튀기는요. 때가 되면 오겠죠. 어쩐 일입니까.”

“티브이 봤지? 그 아끼꼬란 여자 말이야. 사인이 묘해. 출근 전이니 회사 나가보면 뭔가 나타나겠지만···. 쇼크사인데 무엇을 보고 놀랐다는 발표가 없잖아! 뭘 보고 놀랐을까? 참새 배꼽을 봤을 리 없고···. 티브이에 방영된 사건 현장 말이야. 그게 요즘 주가를 올리는 파라다이스 모텔이야. 307호라든가···.”

“천국 갔겠군요. 그곳에서 죽었으니.”

탁원제가 쿡쿡거리자 이달호 차장이 정색했다.

“아끼꼬라는 일본인 처녀가 죽은 파라다이스모텔 307호는 호텔식으로 말하면 각 층에 하나씩 있는 브이아이피(VIP)룸이야. 숙박비가 엄청 비싸겠지. 시경(市警)에 출입하는 우리 쪽 기자 얘기론 임시수사본부를 305호에 설치했다누만. 근데 이상한 정보가 있어.”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