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여러 조각들을 맞춰보면 무언가 흔적이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몫이라 봐요. 다만, 내가 궁금히 여긴 것은 독일의 패망과 함께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히틀러와 담판 짓고 가져온 ‘롱기누스 창’에 대한 거예요. 그 창이 한반도 남쪽의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보거든요. 아니 숨겨졌다고 봐야겠죠.

이제껏 몰랐지만 게이꼬(京子) 양이 상당한 비밀을 간직한 채 한국에 왔거든요. 아직 만나보지 못했으니 어떤 얘기를 하게 될는지 궁금합니다만, 게이꼬는 나름대로 어려운 문제가 있어 내게 숨겼겠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장의 기보가 있었다는데 하나는 [현현기경]의 문제도이고 다른 하난 [관자보]라고 들었어요. 흥미로운 건 두 장의 기보를 만든 도구로 그건 70년쯤 지난 거로 들었거든요.

다시 말해 [현현기경]의 문제도는 지질(紙質)이 650년이나 된 것이고, [관자보]에 사용된 종이는 청나라 강희 연간 때의 것이니 3백 년이 넘은 것으로 봐야겠죠. 종이는 그렇다 해도 그것을 찍어낸 도구가 고작 70년 정도의 물건이니 이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죠.”

그런가 하면 네 폭짜리 병풍에 숨겨진 한시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꼬 여사는 혼란스러운지 한 손으로 이마를 괸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전화벨이 울린 건 그때였다. 술기가 오른 사내가 찾는 것은 박부장이었다. 사무실 건너편 목마(木馬)라는 경양식집에 있다는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김판술(金判述)이라 밝혔다. 삼십대 후반의 사내는 탁원제가 도착하기도 전 양주 큰 병을 3분의 1이나 비워버렸다.

“이렇게 뵙자고 한 것은 박일우 부장의 실종에 관해섭니다.”

김판술은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탁자 위를 한 손으로 거칠게 내려쳤다.

“문사장이 그리 당하고 나니 잠을 잘 수 있어야죠. 이경실이란 년도 어디로 잠적했는지 꿩 구어 먹은 소식이고. 그렇다고 이 일을 함부로 까발릴 수도 없잖아요. 청부살인 자체가 범법 행위니 도대체 꼼짝할 수 있어야죠.”

“경찰에 신고하지 그랬어요.”

“예에?”

“아, 익명으로요. 그런 일은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잖아요.”

김판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을 가졌던 모양이지만 불안감 때문에 단안을 내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청부살인 업자는 어떻게 끌어들였습니까?”

“그건 정사장님이 알아서 했죠. 호출은 내가 했지만요. 정사장님은 우리 심부름센터 대빵이죠. 일을 의뢰받고 나갔는데 실종된 지 꽤 됐어요. 사실 우리 일이 그래요. 마음 졸이면서도 바닥이 나타날 때까지 비밀유질 해야닌까 속이 타도 기다리는 거죠.”

“누가 무슨 일을 의뢰했습니까?”

“한국부동산컨설팅의 장회장 비서라고 들었거든요. 일이 진행 중이라 정사장에게 시시콜콜 물어볼 수가 없더라구요. 그치만 상대가 탤런트고 보니 관심은 갔었죠.”

“탤런트?”

“연기 되게 못하는 배우 있잖아요. 이은하라든가. 그 아가씨에 대해 뭘 조사해 달랬는가 봐요.”

“그래서요?”

“하루는 정사장이 나갔다 와서 껀수 하나 물었다고 흥분하더라구요. 뭐냐 물어도 말을 안해요. 그러더니 2개월 전엔가 열쇠 하나를 주면서 자기에게 연락이 끊기면 서울역 보관함으로 가서 자료를 챙기라지 뭡니까. 나는 돈이 몇 억 들었거나 야리꾸리한 얘긴 줄 알았어요. 아침에 가 봤더니 별거 없더라구요.”

김판술이 내놓은 것은 슬라이드 한 컷과 20페이지 가량의 미니수첩 한 권으로 메모는 고작 세 페이지뿐이었다. 첫 페이지에 메모된 것은 이은하와 신기섭 · 박인철 · 문일봉의 이름이 쓰여 있고, 이쪽저쪽으로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두 페이지엔 남악(南岳)과 오공형(蜈蚣形)이란 문구와 도형이 끼적여 있었다.

다시한번 미니 수첩을 주르르 펼쳤지만 특별한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 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발머리 처녀가 김판술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건네고 물러간 것은 그때였다. 그것을 한쪽으로 밀치며 김판술은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 양반, 신기섭은 여당의 실세 아닙니까? 그리고 박인철 씨는 야당의 부총재! 그 두 사람과 실종된 문일봉이란 배우가 얽혀있단 말씀입니다. 이거 완전히 드라마잖아요!”

“하찮은 삼각관계를 뒷조사시켰다는 건 좀 그렇네요.”

“나도 그 점이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김선생님, 그 슬라이드 좀 볼 수 있죠.”

“그러시죠.”

슬라이드 필름은 둥그런 물건에 새겨진 한시(漢詩)를 촬영한 것으로 불빛 가까이 밀어가자 글자의 윤곽선이 확연히 드러났다. 흑백으로 실루엣을 이룬 둥근 테, 그것은 메달이 분명했지만 쓰여 있는 내용은 탁원제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목을 ‘추사(秋思)라고 붙인 한시는 네 폭 병풍에 나타난 시구와 전연 차이가 없었다. 김판술이 지나치듯 한마디 던졌다.

“조금 전 여기 왔다간 아가씨 있죠. 기미꼬(君子)라는 일본 여성이에요. 관광차 한국에 온 것은 다섯 달 전이라는데 어쩌다가 홀로 떨어져 나왔나 봐요. 정사장이 비행기 표 끊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하자 비자 만료일이 한 달 넘게 남았으니 그 동안 심부름센터에서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그냥 놔둔 거예요. 그런데 정사장이 행방불명이 됐으니···. 하여튼 정사장이나 그 아가씨니 괴짜죠. 일행들이 찾는 모양인데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김판술은 딸꾹질을 계속하더니 안 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술값을 치르고 나서 취한 걸음으로 술집을 빠져나갔다. 5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기미꼬였다. 그녀는 스스로 잔을 채워 훌쩍 입 안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