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이걸 터뜨려요? 저렇듯 일본 아이들이 올 때 경각심을 높이기엔 더없는 기사잖아요. 앞전에 내려다 보판해 주었거든요.”

“아니야, 역효과가 날 수 있어.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특수를 노리느니 어쩌니 떠드는 판에 그 기사 나가면 완전히 찬물이야.”

“일본 관광객들이 전라도로 향하는 이윤 뭘까요?”

“글쎄···. 확실하진 않지만 무슨 터를 찾는다던데.”

“터요?”

“뭐라드라. 무슨 ‘금쟁반형’이라나.”

“그걸 찾아 뭐하게요.”

“낸들 알 수 있나. 소문엔 그래. 그곳에 오동나무를 심으면 왔다라는 거야.”

“왜요?”

“왜긴 왜야. 그걸 심어야 봉황이 날아올 것 아냐. 안 그래? 근데 박부장 어디 갔어? 또 술병난 거야, 인어 꼬리 잡으러 갔어?”

“미스 유한테 안 들었어요? 박부장님 사고 나시어 병원에 계시거든요.”

“뭐어? 또 뭔 일을 저질렀기에 일을 당한 거야. 근데 박부장 책상 뒤에 포장된 저 물건, 우중충한 저 물건은 뭐야?”

“아는 분이 보내온 네 폭짜리 미니 병풍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네 폭짜리 미니병풍? 어디 풀어 봐.”

탁원제가 병풍 쪽으로 가는 것을 보며 하나꼬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로 정한 호텔로 향하는 걸음이 문간에서 멈춘 것은 네 폭짜리 미니 병풍이 모습을 드러내면서였다.

그것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안개에 젖어 흐릿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민감한 기후를 나타낸 그림엔 봄날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듯한 나른한 느낌과, 여름날의 구름,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원(雪原)이 제각각 나름대로의 향기를 만들며 버티고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네 폭 병풍의 하단에 쓰인 ‘부(不)’ ‘지(只)’ ‘사(思)’ ‘중(中)’이란 네 글자였다. 하나꼬 여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지?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그림이 민사장 사무실에서 발견될 줄은 몰랐어.”

“이 그림 박부장에게 보낸 자가 누구야?”

“문치수란 분인데···, 주식회사 미로(美露)의 사장이에요. 구로다(黑田) 그룹에서 판매하는 성기구를 전담 판매해 왔는데 얼마 전 경영악화로 자살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하나꼬 여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혹시···, 그 분의 부친이 문덕수(文德壽) 씨 아니에요? 살아 있다면 구십 세가 넘었을 것입니다만···.”

탁원제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이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작년에 칠순 잔치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아닌가.”

그녀는 소파에 다시 앉으며 병풍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갤러리에도 해묵은 그림이 걸려 있었지만 이 그림은 일본풍과는 전연 다른 분위기였다.
미니 병풍은 각 폭마다 한 자씩의 글자가 쓰여 있었고 그 아래쪽엔 낙관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인주 윤곽이 남아 있었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수놓아진 벌판엔 아름다움을 다투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하나꼬 여사는 그것을 몇 번이나 눈 가까이 가져와 편집부에서 사용하는 확대경을 들이댄 채 고개를 가로 젓곤 하였다.

“민사장.”

“예에, 누님.”

“자네가 보기엔 이 평원에 뭐가 있는 것 같은가?”

“누님 말씀대로 이게 봄날을 나타낸다면 네 폭이니까 ‘춘(春)’이라는 글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쓰인 ‘부(不)’는 봄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데요. 나머지도 마찬가집니다. 분위기로 보면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쓰여 있는 글자는 전연 생소한 것이잖아요. ‘지(只)’도 그렇고 ‘사(思)’와 ‘중(中)’도 마찬가집니다.”

“어쨌거나···, 봄날의 정경을 그린 그림에 있는 이 꽃들, 자넨 무슨 꽃이라 생각해?”

“글쎄요. 봄의 꽃이라면 진달래나 개나리가 아닐까요. 그림의 구도로 보면 대평원이니 아무래도 그런 꽃들이라 보는 게 무난할 거로 보입니다.”

“아니야. 이건 그런 꽃이 아니야. 주위의 꽃들은 무궁화야. 내 생각이 맞다면 이 병풍은 적어도 백 년은 넘었을 것이네. 최근까지 소유한 자가 문씨 성을 썼다면 아마 문덕수는 그 집안과 무척 가까운 관계였을 거야. 민사장, 이곳에 레몬 있어?”

“좀 전에 보니까 있는 것 같았어요. 생선회 주문했을 때 가져온 걸 미스 유가 냉장고 한쪽에 넣어둔 것 같았거든요.”

“어서 가져와요.”

하나꼬 여사는 민사장이 가져온 잘려진 레몬 조각을 반으로 접어 병풍에 쓰인 글자 아래쪽에 쥐어짜듯 떨어뜨렸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레몬 조각은 네 곳의 글씨 아래쪽을 적시는 데 충분했다. 그것들이 마르기를 기다려 일회용 라이터 불빛을 갖다 대자 희미하게 윤곽이 살아 돋았다. 그것은 각 폭마다 5행으로 이루어진 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