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일병이 입을 열었다.

“이게 차함이라면,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네. 50여년 전 신기루 같은 인물이 전라도 정읍 땅에 출현해 600간짜리 사설 궁궐을 짓고 60방주(方主)를 거느린 도깨비 같은 일을 해냈네. 갑오년 동학난 때 정읍 두령을 지낸 차치구의 아들 차경석(車京石)이야.”

차경석은 1907년 흠치교에 입교해 강증산(姜甑山)의 아홉 제자 중 맨 끝자리를 차지했다. 이로부터 2년 후, 1909년 9월에 강증산이 타계하자 서른 살이 된 차경석은 모악산(母岳山)으로 들어가 열닷새 동안 금식 기도를 올리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선도교(仙道敎)라는 이름으로 전라도 일대를 돌며 포교하자 수제자 김형렬(金亨烈)도 태을교(太乙敎)를 만들어 포교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둘 다 강증산을 교조(敎祖)로 받들었다.

“차경석이 강증산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지 9년 만인, 1921년 9월 24일. 흠치교는 덕유산 아래 황석단에서 교명고천제(敎名告天祭)를 지내고 보천교(普天敎)로 이름을 갈았네. 머지않아 천지가 개벽하는 세상이 온다고 우매한 백성들을 흔들며.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끊지 않으면 개벽이 일어났을 때 초열지옥에 떨어진다고 으름장을 놓았네.”

탁원제의 물음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차함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군요.”

“그렇지. 쌀 한 가마니에 1원일 때, 차함(借啣)이란 딱지는 100원 상당이었네. 천국을 예매하는 조건으로 쌀 1백 가마를 보천교에 바친 거지.”

문제는 거기 있는 게 아니라 했다. 채일병 소장은 자신이 조사해온 여러 정황에 대한 요점을 간추렸다. 첫째는 보천교의 사세확장이었고, 둘째는 조선총독부 태도였다.

“보천교는 차함을 이용해 수많은 자금을 끌어들였네. 조선의 땅덩어리 10분의 1을 살 수 있는 거금을 걷어 들였는가 하면, 6백간짜리 사설궁궐을 지어 천하를 호령할 태세를 갖췄어. 흥선대원군이 팔도의 장정을 끌어다 3년여에 재건한 경복궁 근정전은 완공될 때까지 말이 많았지. 재정이 바닥나자 남대문에서 나무장사 · 물장사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세금을 물렸잖은가. 그것이 원납전(願納錢)이야.”

천하를 호령할 권세가 차경석에겐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말 한마디에 정읍 깊은 골짝에 근정전의 4배 가까운 건물을 짓고 보천교도들은 갈수록 늘어나 교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갔다. 그런데 왜 조선총독부에선 가만있었을까?

“종교 문제를 연구하다보니 뜻밖의 사실에 넋이 달아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네. 보천교가 일어날 때는 시기적으로 삼일 운동이 정점에 달했을 때야. 조선 백성들이 항일운동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보천교의 교세 확장을 못 본 척 해준 거네.

조선총독부 대외비 조사 자료 20호엔 조선 사람들의 사상과 성격을 세밀히 분석하여군중이 움직이는 방향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네. 그런 점으로 보아 당시 보천교의 교세 확장은 조선총독부가 눈가림을 해주었다는 계산이 나오네. 바로 우민 정책(愚民政策)이지.”

채일병은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네. 그동안 신문 방송을 보아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종교적으로 문제가 많아. 천리교(天理敎)도 그렇고 일련정종(日蓮正宗)도 갈수록 교세가 확장돼 가고 있네. 어디 그뿐인가, 사이비 기독교 신앙과 보고 듣지 못한 종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도 까닭이 있어. 하루 다르게 교세가 확장돼가는 신도교(神道敎)도 예외는 아니지. 예전엔 민족 종교라는 이름으로 교세를 이끌던 단체들도 지금은 이방 종교와 믹서된 혼합 종교 스타일로 변했으니까.”

잠자코 있던 우암이 끼어들었다. 그는 며칠 전 남도 지방을 돌아보고 온 것을 입에 담았다.

“정읍 일대엔 그런 소문이 돌더구만. 누군진 모르나 그 옛날 보천교의 영화가 남아있는 오성귀원(五星歸垣 ;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의 터를 사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곳을 많은 사람들이 남악(南岳)이라 부르는 것도 떨떠름하다구 말이야. 살다보면 해괴한 일도 많을 것이지만, 쓰러진 영웅의 자취를 사들이는 건 올바른 일이 아니야.”

문득 우암이 덧붙였다.

“가만, 그렇게 본다면 이건 차함이 아닐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신지?”

“차함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드네. 차함은 직위가 써 있기 마련이야. 그래야 누가 얼마나 냈는지 한눈에 분간 되니까. 자네가 가져온 것은 차함과 크기가 비슷해도 뒷면에 내용물이 없잖은가. 그러니까 차함이 아닐지 몰라. 그렇다면 뭔가? 이거야말로 미끼가 아닐까? 호랑이 어금니로 너구리를 불러들이는 그런 미끼가 아닐까?”

“이 딱진 송원장의 차에 떨어진 거랍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가 이상한 기미를 느꼈다면 자네에게 뭔가 선심 썼을 거야. 아니 그런가? 직접 나서기는 뭣하고, 그런 저런 이유로 자네에게 그걸 줬을 것이네. 자네가 움직이는 걸 보고 뭔갈 결정하려는 게지. 그런 생각 아니 드는가?”

삐삐가 울었다. 무릎걸음으로 돌아앉으며 탁원제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탁기자님, 저 유상희예요. 오후 늦게 일본에서 사장님이 돌아오신다고 연락왔거든요. 그리구···, 석간신문 안보셨죠?”

“무슨 일 있어요?”

“잠깐 이쪽으로 오실래요. 퇴계로에 있는 피닉스 다방이요. 네에, 그래요. 2층에 있는!”

탁원제는 서둘러 피닉스 다방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유상희가 석간신문을 펼쳤다. 점심시간이 지나 바로 나왔으니 내용면으로 조간신문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앞 뒷장을 넘기다 사회면을 짚었다.

“여길 보세요. 이 기사요!”

유상희가 가리킨 것은, 변사체로 발견된 주식회사 미로(美露)의 문치수 사장에 관한 기사였다. 일본의 구로다 사로부터 ‘성기구’를 들여온 후 경영 악화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빚잔치를 하고 남은 재산은 미망인 이경실에게 남긴다는 유언장도 공개되었다. 이경실의 행방이 묘연해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내용을 더듬는 그녀의 눈가엔 잔뜩 두려움이 고여 있었다.

“저기요, 박부장님한테 큼직한 소포가 왔거든요. 뜯어봤더니 봉투 하나와 네 폭짜리 미니 병풍이 들어 있었어요. 오랜 된 것 같았거든요. 근데, 박부장님은 어때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한두 주일 지나면 나오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상희는 훅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 제 탓이에요. 제가 그걸 드리지만 않았어도.”

유상희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봉투에 든 자료를 풀어놓았다. 어느 중학생이 뺑소니 사고를 목격하고 잡지사로 보낸 편지의 복사된 자료였다. 탁원제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사건은 주식회사 미로의 문치수 사장과 관계있는 거야?’

냉수를 한 컵이나 마시고 나서 탁원제는 골똘해졌다.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이어가다 사고 당시 박부장의 주머니에서 나왔던 괘사를 떠올렸다.

<서입심고(鼠入深庫) 반묘궤문(斑猫跪門).>

“창고 깊숙이 들어간 쥐를 얼룩고양이가 노리고 있다? 얼룩 고양이? 문치수? 그는 죽었잖아. 그렇담 누구지?”

탁원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