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과 출신인 탁원제는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송나라 신종 때 일어난 영혼(靈魂)과 신(神)에 대한 논쟁이었다. 세상엔 신이 있고 따라서 영혼이 있다는 소강절의 주장을 정이천(程伊川)이란 학자가 정면으로 부인한다. 당연히 소강절의 추궁이 따랐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가?”

“그것은 후손들에게 조상 숭배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서지. 그렇게 해야 효도를 할 게 아닌가.”

정이천의 주장대로라면 제사는 단순한 관습에 불과했다. 소강절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저기 공중으로 천군만마가 지나가네. 자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무리 설명한들 무슨 소용 있는가. 마치 소경에게 아름다운 산수화 그림을 설명하는 격이지.”

정이천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그래? 그렇다면 그 천군만마들은 수레를 비롯하여 안장이나 칼이 없겠지. 사람과 말은 생명이 있으나 수레나 무기는 생명이 없을 테니까.”

이러한 논쟁은 소강절이 죽어가는 임종 직전까지 이어졌다. 정이천은 그곳까지 찾아와 ‘신이 있다’는 예전의 주장이 허위였음을 시인하라고 을러댔다. 소강절은 두 팔을 오므렸다 펴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운명했다.

“그대가 말하기를 생강이 나무에서 열린다고 하니 이제부턴 나도 자네 말을 좇겠네.”

생강이 땅속 뿌리에 달리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나무에 열리는 것으로 고집한다는 뜻이다. 또한 두 팔을 오므렸다 편 것은 좁은 소견을 넓게 가지라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이천은 허황된 인물인가. 그건 아니다. 그는 ‘제사’를 현실로 이끌어내는 데 공로가 큰 분이다. 당시만 해도 제사는 봄 가을로 날을 받아 손님들을 청해 성대히 치렀다. 즉, 죽은 날 지내는 기제사(忌祭祀)라는 게 없었다. 이것을 정이천이 창안해냈다.

또한 무덤에 제사 지내는 묘제와 시사(時祀)도 만들었다. 그러나 정이천은 끝내 무신론자였다. 산 사람이 자기만족을 위해 올리는 것이 제사라는 것이다.

초하의 설명이 이어졌다.

“소강절의 파자점은 단지 글자를 쪼갠다는 의미 이상이에요. 쪼개진 글자의 자모나 획을 기준 삼아 그날의 일진을 합해 길흉을 헤아립니다만 점법의 오묘함은 필설로 그려낼순 없어요. 어쨌든 탁기자님이 송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으로 봐야죠.”

“저 역시 그런 생각입니다만, 그래도 몇 가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리구 이건, 그날 밤 차를 훔쳐 탄 범인들이 차 안에 흘린 물건이랍니다.”

탁원제가 꺼내놓은 붉은 조각을 보는 순간 그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함(借啣)이 아닌가요.”

“차함?”

“마침 잘됐어요. 종교문제연구소 채일병 소장님이 별채에 와계셔요. 우암 숙부님과 면담이 거의 끝났을 테니 채소장님을 만나 보세요. 아주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실 거예요.”

탁원제는 곧 별채로 안내되었다. 우암과 채소장은 뜻밖의 물건에 놀란 표정이었다.

“이게 차함이라면 일이 상당히 진행 됐을 것이네만, 채소장 생각은 어떠시오?”

“제가 걱정하는 것도 그겁니다. 그동안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손을 썼지만 항상 헛손질이었어요. 이런 게 발견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한데, 어떤 연유로 이 물건이 송학수의 차에 떨어져 있었을까요?”

탁원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분께선 모르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다면 그럴 게야. 송원장은 몰랐겠지.”

너무 쉽게 믿어버려 오히려 탁원제가 머쓱해지자 우암의 설명이 깔렸다.

“송학수 그 사람은 점을 치건 손님을 만나건 빈 말이 없네. 어느 때인가 중요 관직에 앉은 각료가 찾아와 파자점을 쳤네. 한 일(一)자를 찾아내자 송학수는 탄식했어.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후론 나오질 않고 돌아가라는 거야. 왜 그랬을까?

한 일자는 삶(生)의 끝 획이고 죽음(死)의 시작 글자니 목숨을 잃을 건 시간문제라는 게지. 그 각료는 송학수의 집을 나선 지 얼마 후 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네. 비방을 만들어 줄 수 없는 송학수로선 곤욕스런 시간이었을 것이야. 그 사람은 실과 허를 알았으니까.”

그런 사람이 준 물건이니 백 프로 믿는 눈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붉은 색 조각을 보는 순간 둘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