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송학수의 얘기가 이어졌다. 시게루 기자는 한국에서 간행되는 월간잡지 스캔들의 발행인 민우기의 조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오늘 오후 늦게 민사장과 그의 누님 하나꼬 여사가 서울에 도착할 걸세. 가제본 된 이 책(毋)은 하나꼬 여사가 보낸 것인데, 인쇄 하는 중에 불이 나 전부 소실된 것으로 언론엔 보도됐네. 다행히 시게루 기자가 교정본을 만들려고 스리지(교정지)를 뽑았는데, 그것만 살아남았다고 써 있더구만. 하나꼬 여사가 들어오면 일본 기계의 동향이나 그 동안 궁금해 하던 것들이 어느 정도 밝혀질 걸세. 가만, 그러고 보니 탁기자도 민사장 회사의 직원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저희 잡집니다. 여타의 가판용 잡지로선 최고인 5만부를 찍습니다. 10만을 오르내린 예전의 호황기를 감안한다면 당연히 7만은 찍어야지만, 지금은 너나할 것 없이 잡지가 어려운 때니까요.”

탁원제는 작설차로 입안을 적시며 생각을 굴렸다. 신발창이 닳도록 다녀봐야 신통한 광고 하나 없는 게 요즘 현실이다. 수십 통  전화 때려야 건성으로 ‘다음에 보자’는 말이 고작이지만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살아 돋았다. 그는 얼른 토를 달았다.

“광고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판용 내지(內紙) 광고는 안면 박치길 했을 땐 흑백이 삼십 만이고 칼라가 육십이거든요. 게나 고동이나 잡지를 만드는데다 한 달에 1백 부도 안 팔리는 게 부지기수죠. 그래도  광고빈 똑같아요. 그러니 ｢월간 스캔들｣ 같은 베스트 잡지가 데미지를 입는 거죠.”

송학수는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부좌를 튼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은 여전히 시계추마냥 흔들렸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송학수가 상대의 말을 잘랐다.

“일년 광고비 얼마요?”

‘일년 간?’

탁원제의 머릿속에 박힌 톱니바퀴가 급회전했다. 요즘 같은 불황에 일년 간 광고비를 빼먹을 수 있다는 건 하느님이 보우하사 대한민국만세다. 숱하게 점쟁이 사무실을 찾아다녔지만 고작 몇 만원짜리 쪼가리 광고뿐이었다. 결혼상담소니 무슨 펜팔클럽이니 하는 것도 차포 떼면 애들 껌 값이다. 대여섯 번 찾아가 어렵사리 수금해오면 민사장은 삼칠제를 고수하니 어쩌니 침 튀기며 푼돈 몇 푼 던져주고 돼지 머릿고기 한 접시에 소주 두 병으로 마무리였다.

“어이 탁기자. 으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가정보다 직장이 중요하다고 보네. 으째서 그러냐? 직장에 다님으로써 월급을 받고, 그 월급으로 에편네와 자식새끼들이 먹고 살잖아. 그라니까 직장이 가정보다 중요한 거여.”

그럴 때마다 소주를 털어 넣으며 탁원제는 ‘염병 하네’란 말을 안주 삼아 씹었다. 잡지사에 들어온 지 3개월, 지금껏 수습기자라는 딱지 때문에 월급 한번 변변히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남은 수습기간 3개월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신물이 넘어올 정도로 배알이 뒤틀렸다.

“수습은 뭔 놈의 수습. 어디 가서 삥쳐 오면 아예 국장 대우지. 염병할 새끼.”

그동안 폭로기사를 써 반공갈을 하거나 돼먹지 않은 미담기사의 대가로 책을 팔아 버텨온 것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끔찍했다. 이런 때 일년 간의 광고비는 겨울 가뭄을 해갈시키고도 남을 박수치고 웃을 일이었다.

“이왕에 광고를 내실 바엔 칼라로 하시죠. 월 육십이면 일 년에 칠백이십입니다. 일시불이면 육백오십까지 조정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송선생님!”

“그 문젠 우선 접어 두고···.”

송학수는 서랍에서 ｢월간 스캔들｣ 8월호를 꺼냈다. 표지엔 탤런트 이은하의 활짝 웃는 모습이 호화스러웠다. 꽉 조인 수영복 위로 스물 둘의 터질 듯한 젊음이 요염한 포즈 속에 숨어 있었다. 송학수는 검지 끝으로 그녀를 짚었다.

“이 탤런트에 대해 알 수 있겠소.”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야죠.”

“이를테면 가족 사항 같은 거요. 어디서 누구와 살고 하루 일정이 어떤지?”

“알아봐 드리죠.”

“그리구…. 표지 사진 어느 분이 찍으셨소?”

“저희 부장님입니다.”

“직접 찍었겠지요?”

“그럼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탤런트가 걸고 있는 목걸이요. 여길 보시오. 목걸일 하고 있지요?”

“아, 예에. 저도 본 적 있습니다. 뱀인가 뭔가가 새겨진 메달 같은 거로 기억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