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복자의 접수를 맡은 민주아(閔珠雅)가 작설차 두 잔을 내어왔다. 스물다섯이라고 보지 않을 만큼 앳돼 보이는 처녀였다. 호족반(虎足盤) 소반에 내어온 찻잔 뚜껑을 다소곳이 벗겨내고 일어서자 한모금의 차로 가볍게 입술을 적신 송학수는 뜰로 난 밀창을 열었다.

“역대 이 나라엔 비기와 도참이 많았네. 반정을 위해 예언을 위장한 쪽도 있었고, 이변이 일어날 걸 염두에 두고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떠나라고 경고한 이도 있었네. 기자 양반은 계룡산에 가보셨는가?”

“국도(國都)가 될 땅이라 하여, 대학교 다닐 때 현장 실습을 나간 적 있습니다.”

“그럼 신도안(新都內)이겠구먼. [도선비기]에 의하면 송도는 5백 년으로 이씨가 나라를 탈취해 한양에 천도한다 했고, 한양은 4백 년으로 정씨가 국권을 찬탈해 계룡산에 축(築)한다 했네. [정감록(鄭鑑錄)]엔 ‘계룡이 정씨의 8백년 지지’라든가 조선이 어느 때 망할 것이라 씌어 있는데. 혹시 광악유결(光嶽遺訣)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아닙니다.”

“거기 쓰인 글 가운데 ‘방부인제 국혹다화(方夫人才 國或多禾)’란 문구가 있네.

“조선의 멸망을 나타내는 예언입니까?”

“그렇지. 방부(方夫)는 경(庚)의 파자고 인재(人才)는 술(戌)의 파자네. 국혹(囗或)은 국(國)의 파자며 다화(多禾)는 이(移)의 파자네. 이를 합하면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을 맺은 경술년에 나라가 망한다는 경술국이(庚戌國移)가 아닌가. 그런데도 믿지 않는다? 이거야 말로 불행한 일이지.”

대체로 예언서들은 측자나 파자가 아니고선 뜻풀이를 할 수 없다는 맹점이 있었다. 송학수는 화제를 돌렸다.

“가만, 어느 잡지사 기자시더라.”

“｢월간 스캔들｣입니다.”

“흐음, ｢스캔들｣. ···차 문제에 대해 말해두겠소만 우연의 일치니 나완 연결 지어 생각지 말아요. 괜한 시간 낭비니까.”

송학수는 점상 아래서 ｢월간 무(毋)｣ 9월호를 집어 들었다. 이 잡지는 일본에서 간행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 일어난 미스터리한 사건만을 추적하는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잡지였다. 잉크 냄새가 마르지 않은 걸 보니 항공편으로 도착한 것은 하루나 이틀 전쯤으로 생각되었는데 중요한 부분을 읽었는지 주르르 책장을 넘기며 접혀진 부분을 앞으로 내밀었다.

활자가 고딕체로 큼직하게 뽑힌 것은 ‘기산(機山)은 조선에 있었다’였고, 기사를 쓴 이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바둑평론가 야마다(山田)의 아들 시게루(茂) 기자였다. 

<···나는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를 둔 일본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들이 나누는 얘기를 잠자리에서 들은 적이 여러 차례였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생전에 해오시던 갤러리(하나꼬 겔러리)를 어머니께서 운영해 오시는 것으로 보아 평소 같은 의도가 있으셨기에 미술과 바둑에 심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