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사장님.”

화들짝 놀란 유상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을 추슬러도 정확치가 않다. 만취한 상태인 데다 생전 처음으로 사내의 단 숨을 맡게 되자 온몸의 맥이 풀려버렸다.

민사장은 일을 치르고 나서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돈 봉투를 내놓았다.

“정말 미안해. 요즘 마누라가 몸이 안 좋아 줄곧 홀애비 생활이야. 미스 유의 청순미가 날 충동시켜 일이 벌어졌지만 정말 미안해.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미스 유에게도 좋은 일 많이 생길 거야. 요즘 일본에 계신 누님이 자꾸 호출하니 내가 자리 비우더라도 사무실 살림을 잘 좀 해주고.

···이건 한 달치 봉급이야. 그리고 내일 미스 유가 받을 봉급은 따로 있어. 미안한 마음에 준 거니까 받아 둬.”

이날 비밀스러운 일을 만든 후 크고 작은 일을 은밀히 수행해 나갔다. 사장의 측근이 되어 한 달 봉급을 더 받는다는 것, 그녀에겐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다.

평소 라뽁기로 점심을 메꾸다가 그날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취재부나 편집부 여직원이 라면으로 때우자는 성화여도 그녀는 기를 쓰고 나가 외식하고 돌아왔다.

야릇한 사건은 다음달 9일 점심시간에 일어났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낯선 여자가 민사장을 찾는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여보시오, 거기 스칸두룬가 뭔가 하는 잡지사 맞지라우? 싸게 싸장님 좀 바꿔주시드라고잉. 아, 사장님이라구라잉. 긍께 뭣이다, 나는 유상희란 가시나의 큰 이몬디라우잉.

뭣이어? 없다고라우? 어딜 갔불었는갑네요잉. 점심 먹을라고 나갔다고라잉. 어메어메, 아무데서나 묵어뿔지 뭐한다고 나갔으까잉. 그년 들어오믄 빨리 삼동병원으로 오라고 하시오잉. 지 이모부 다 죽게 생겼은께!”

삼동 병원 몇 층 몇 호실인지를 물어보기도 전에 전화가 달칵 끊겼다. 평소 직원들이 전화를 잘못 받는다고 소리소리 고함지르던 민사장이고 보니 처지가 묘하게 바뀌었다.

30여분 쯤 지나 유상희가 들어오자 민사장은 우물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미스유 큰 이모님 말이야.”

“큰 이모요?”

“그분 되게 성질 급하데.”

“집에서 전화했어요?”

그녀가 수화기 드는 것을 민사장이 저지했다.

“전화해도 소용없어, 지금 삼동병원에 계시니까.”

“무슨 일루요?”

“글쎄, 다짜고짜 큰 이모부가 다 죽게 생겼다는 거야. 무조건 삼동병원으로 오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리잖아. 전화를 했으면 몇 층 몇 호실인질 말해줘야 고생 안하지. 미스유, 오늘은 아무래도 시제 파악이 안 되겠어. 내일 출근해서 하기로 하고.”

민사장은 그녀를 사장실로 불러 준비한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

“위급하신 모양인데 함께 있어야지. 혹시 응급실에 있을지 모르니까 그쪽부터 확인해 보구. 사무실 일은 신경 쓰지 말아.”

유상희는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혈연적으로 자신에겐 큰 이모가 없었다. 어머니는 달랑 남매뿐이다. 서울 생활을 하다보면 편의상 큰 삼춘이나 큰 이모라 부를 상대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녀의 고향 정읍 쪽 사투리를 쓰는 토박이 이모는 없었다.

병원 앞 택시 정류장에서 내리자 그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처녀가 어깨를 툭 쳤다.

“아가씨가 유상희지라우!”

“누구시죠?”

“와따 징하게 이쁘게 생겼네.”

“네에?”

“성깔을 부리면 더 이쁘겄는디. 그라믄 못 쓰제. 으떻게 큰 이모한테 인상 구기고 노려보까잉. 정말로 내 성질 도까불라고 그라요? 그라믄 못 쓰제.”

그 처녀가 빙긋 웃었다. 큰 이모란 말도 튀어나오자 놀란 눈으로 처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녀는 건널목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박선배, 나 갑니다. 이 아가씨 괜찮아 보여.”

그녀는 유상희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

“잘 해봐요. 박선배 괜찮은 사람이에요.”

병원 쪽에서 건너온 것은 박일우였다. 성우 학원에 다니는 후배를 길거리에서 만나 이번 전화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회사에 다니는 여직원이 핑계거리를 대고 나오기 쉬운 장소. 그곳은 종합병원이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혹시 동료 회사원과 같이 올까 싶어 잠시 몸을 숨겼다고 털어놓았다.

“뭐예요, 놀랬잖아요.”

“미안해. 미스 유 불러내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거든. 자, 자. 우선 가까운 횟집에 들어가 배 좀 채우구.”

“무슨 일인데요?”

유상희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곱게 눈을 흘기며 따라 들어왔다. 조용한 2층으로 올라와 방을 정한 후 일우의 물음이 떨어졌다.

“미스 유, 혹시 [위기칠보도(僞碁七鴇圖)]라는 책에 대해 들어 보았어?”

“글쎄요.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왜요?”

“예전에 말한 가리가네(雁金準一)라는 자 있잖아. 그 자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화적으로 조선의 국수급 기객들과 바둑을 두며 친분관계를 쌓았는데, 그 자를 따라 온 이가 가리가네의 조카 야마다(山田)란 젊은이야.

그가 일본에 있을 때 크고 작은 분란을 많이 일으켰는데 특히 ‘사기 바둑’을 두거나 ‘암수’니 ‘함정수’로 내기바둑을 만들어 피해자가 많이 늘어난 모양이야. 그 자가 숙부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가 사기 바둑에 관한 책을 만들었는데 바로 [위기칠보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