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코끝을 간질이는 복숭아 훈향이 감미로웠다.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일까. 일우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냄새 나는 것만으로 반가워 몸을 일으키자 누군가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님, 이 사람 깨어났나 봐요.”

눈앞에는 열대여섯 남짓의 처녀 아이와 예순은 넉넉해 보이는 노부인이 서 있었다. 인자한 낯빛의 노부인은 단장을 짚은 채 그의 모습을 애처롭게 내려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어서 나가요.”

“예에?”

“젊은이 능력이라면 오행구기점법 하나만 가지고도 운수점은 칠 수 있어요. 괜스리 능력 밖의 일에 뛰어들어 혼란을 일으키지 말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젊은인 귀교(鬼交)에 걸렸어요. 죽은 영과 관계한 거죠. 아직은 의지력이 남아 젊은이의 몸주가 되지 않았지만, 머잖아 그렇게 될 날이 올 거예요.”

노부인의 말이 떨어지자 열대여섯 남짓 돼 보이는 처녀의 눈빛도 사나워졌다.

“문제는 이 사람의 의지가 어느 정돈가예요. 점법을 배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녜요. 다섯 가지 과목만을 익히는 것으로 점법을 깨우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죽이 창안한 오행구기점법 역시 다양한 점법의 한 갈래일 뿐이에요.”

“예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젊은인 호리녀에게 무엇을 배웠나요? 그 옛날 제갈량에게 주었다는 세 권의 천서를 가르치던가요?”

“아닙니다.”

“뭔가요?”

“화투장 돌리는 기술이었어요.”

“그년이 젊은이에게 가르친 건 잡술이에요. 구천현녀의 시녀였다고 홀림수를 쓰던 그년은 고작 산천을 떠도는 잡귀랍니다. 아시겠어요?”

“그럴 리가. 호리녀는 오행구기점법을 쉽게 풀어냈거든요.”

“그래서 믿은 거군요. 그년이 오죽(烏竹 ; 윤사달)을 홀려 알아냈으니 점법이 능수능란할밖에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젊은이에게 점법을 가르쳤겠지요. 오래 전 잡귀의 장난에 빠진 오죽이 빠져나오려다 곤욕을 치렀어요.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오죽은 잡귀의 훼방을 견디지 못해 결국 여길 나갔거든요.”

노부인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오행구기점법을 배웠으니 오행점(五行占)을 익히는 것도 괜찮을 법해요. 그렇다고 두 점법이 짝을 이룬 건 아니니 다른 생각은 마세요.”

노부인은 붉은색 주머니에서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가 씌어진 다섯 개의 조각을 꺼내들었다. 그것들은 한 개가 2.5센티 가량으로, 베어낸 나무 가지를 잘라 중앙을 쪼갠 것들이었다. 재료는 동쪽으로 뻗은 대추나무나 복숭아나무로 이것들은 신접(神接)하는 데 놀라운 효능이 있었다. 노부인은 다섯 개의 조각을 쥐고 신에게 기원했다.

“기미년 계유월 경자일에 기원하옵니다. 신딸이 하늘에 비옵나니, 무릇 하늘에 말씀이 있으면 땅에 있을 것이니 감응하시면 순통하십시오. 지금 서울 장안에 사는 박일우의 운수점을 치오니 신명께선 거역치 마시고 점지해 주십시오.”

오행점에서는 또 다른 방법의 하나로 문복자의 생년월일을 말해 길흉 점지를 바라기도 한다. 기원하는 문구는 세 번을 되풀이하고 그 다음에 오행 글자로서 점괘를 얻어 길흉을 헤아린다. 노부인이 뿌린 조각은 바닥에 떨어져 금화토(金火土)로 나타났다.

“상괘로다. 이지러진 달이 보름날 밤 다시 영글어 밝아지니 어둠이 사라졌다.”

“무슨, 뜻입니까?”

“기울어진 달이 다시 밝아졌으니 어찌 옛일이 새로워지지 않겠는가. 혼사가 순조롭고 먼데서 서신(연락)이 올 것이네.”

노부인은 설명했다.

“점목(占木)을 취함에 있어 박달나무를 쓴 것은 속이 단단해 잡귀가 틈타지 못하기 때문이네. 동쪽으로 뻗은 나무 가지를 취하는 건 그쪽으로 뻗은 것만이 악귀를 쫓기 때문이요.”

노부인은 일우가 태어난 사주를 일러 받아 점목(占木)을 다시 던졌다. 떨어진 것은 뜻밖에도 하괘였다. 노부인은 이마를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괘사가 하괘라니 이 또한 해괴한 일. 어찌 점괘가 극과 극을 달리는가? 분명 호리녀의 장난질을 피할 수 없게 되겠는 걸.”

노부인은 골똘해졌다. 뭔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잠시 주위를 서성이다 단언을 내렸다.

“호리녀 그 년은 여우 영(狐靈)을 받았고, 나는 뱀 영(蛇靈)을 받았어요. 그러니 만나면 상대를 치지 못해 안달이죠. 그년에겐 호주(狐珠)가 있어 제 세상 만난 듯 밤에 날뛰지만, 나에겐 여의주(如意珠)가 있으니 그년의 사술을 저지할 수 있어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년과 부닥쳐 호주(狐珠)를 빼앗는 게 좋겠어요. 힘들더라도 다섯 관문을 깨뜨려 와룡패(臥龍牌)를 손에 넣으세요. 우선 그년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갈량의 진법부터 배우는 게 좋겠군요. 그런 다음 귀신도 사로잡을 수 있는 천라지망의 묘수를 가르쳐 드리겠어요. 자, 이쪽으로 따라 오세요.”

노부인의 자애로운 미소는 일우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