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는 몹시 흡족한 듯 턱밑 수염을 쓸어내리며 비망록 같은 얘기를 덧붙였다.

“인생이란 말아 감은 비단 같은 거여. 조금씩 펼치며 안에 든 무늬를 드러나게 하는 거제. 한꺼번에 드러내면 하늘의 시샘을 받게 돼. 재주라는 건 집 속에 든 보검처럼, 예리한 빛은 감춰야 하니까!”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며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반나절이 지난 건지 하루가 지난 건지 분간 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지 희미한 빛살이 새어 들었다. 그것은 햇살이라기엔 너무 약한 은은한 빛줄기였다. 달빛인가? 실눈을 뜨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때 빈정거리는 어투의 낯익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살았니, 죽었니?”

가까이 다가온 처녀가 작은 종구라기를 들고 있었다. 안에는 죽(粥)보다 더 진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처녀는 그것을 일우의 입에 흘려주었다.

“이제 힘이 날 거야. 땅 속의 복령(茯笭)이 삭아 술이 된 거야. 자, 마셔!”

처녀는 야릇하게 눈을 흘기며 까르르 웃어댔다.

“어때, 내 말대로 할 거지? 약조한다면 우선 오행구기점법을 가르쳐 줄게. 그렇게 할 거야, 총각?”

처녀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석실 안을 울렸다.

오행구기점법(五行九忌占法).
무척 장황해 보이지만 원리는 간단했다. 이제까지 이 점법이 오죽 선생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라는 예감이었다. 이 점법은 구궁진변을 찾아온 오죽 선생의 몸주 호리녀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돌침상 위에 좌정한 채 물었다.

“총각은 방위와 사계, 스물 네 시간의 배속이 어찌 연결되는지 알아?”

“모릅니다.”

“그럼, 아침에 거부가 되고 저녁에 신선이 된다는 말 들어보았어?”

일우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괘는 없어. [주역]도 마찬가지야. ‘완성된 괘'는 없어. 점(占)이나 택일(擇日) · 방위(方位) · 궁합(宮合) · 지술(地術;풍수지리술)도 ‘순길(純吉)한 괘'는 없으니까. 왜냐하면 크게 좋은 괘는 반드시 작은 해(害)가 따르거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이를테면 반딧불 같은 거야. 반딧불은 빛을 발하지만 햇볕이 찬란한 대낮엔 그 빛이 잘 보이질 않잖아. 그렇지? 대흉(大凶)이 대길(大吉)보다 유리할 때가 있어. 그것은 대길이 보름달처럼 기울고 있는 징후를 보이되, 대흉은 그믐이 되어 초승달처럼 일어설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지. 삼한 시대 백제가 망할 때 ‘신라는 초승달이오, 백제는 만월이다'라 한 것은 대길과 대흉을 대비시켜 설명한 것이야.”

호리녀는 돌침상 위에 배속표를 쓱쓱 그려댔다.

“구성(九星)과 오행이 어떤 배속 관계가 있는질 알아야 해. 구성이란 뭐냐? 일백(一白) · 이흑(二黑) · 삼벽(三碧) · 사록(四綠) · 오황(五黃) · 육백(六白) · 칠적(七赤) · 팔백(八白) · 구자(九紫) 야. 자, 여길 봐!”

호리녀는 아래쪽에 다음과 같이 끄적여 놓았다. 목성(木星)은 삼벽, 사록이고 화성(火星)은 구자, 토성(土星)은 이흑, 오황, 팔백이고, 금성(金星)은 육백, 칠적이며, 수성(水星)은 일백이다.

“배속관계는 이래. 일백수성(一白水星) · 이흑토성(二黑土星) · 삼벽목성(三碧木星) · 사록목성(四綠木星) · 오황토성(五黃土星) · 육백금성(六白金星) · 칠적금성(七赤金星) · 팔백토성(八白土星) · 구자화성(九紫火星). 이 구성에 따라 자신의 하루 운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오행구기점법이야.”

그녀는 이 점법을 설명하기 위해 준비된 둥근 판을 꺼내놓았다. 속칭 뺑뺑이라는 것으로 둥근 원을 다섯으로 나누고, 각 구획마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썼다. 글자가 있는 부분은 그에 상당한 색을 칠했다. 목은 청색, 화는 빨강, 토는 황, 금은 백, 수는 흑이다.

둥근 원주의 중앙에 구멍을 내어 빙그르르 돌린 후 다섯 구획을 향해 다트와 같은 바늘침을 꽂는다. 바늘은 목화토금수의 어느 한 부분에 찍히게 되고, 이것을 근간으로 괘사를 헤아린다. 호리녀는 이것을 실증적으로 풀어냈다.

“어떤 사람이 경마장에 갔다고 가상해 봐. 이 사람은 마필(馬匹)의 건강이나 성적 등을 토대로 우승 가능마를 찾아내겠지. 만약 1부터 12까지 열두 마리 경주마가 있을 때, 어떤 말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자신의 운수가 말과 맞아떨어져야 해. 어떤 말을 찾아야 하는가? 그 말을 찾는 방법으로 오행구기점법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지.”

일단 뺑뺑이를 돌려 두 번 찍고, 그 결과를 ‘목화토금수'에서 찾아 일진(日辰)을 맞춘다. 만약 그 사람이 木(목)과 金(금)을 얻었다고 가정하면 그날의 일진은 삼벽 · 사록 · 육백 · 칠적이다. 이 일진은 다음의 기준에 대입하여 우승 예상마를 찾아낼 수 있다. 즉, 일백수성(一白水星)의 수상(數相)은 1과 6이다. 이흑토성(二黑土星)의 수상은 5와 10이다. 삼벽목성(三碧木星)의 수상은 3과 8이며, 사록목성(四綠木星)의 수상도 3과 8이다.

육백금성(六白金星)의 수상은 4와 9며, 칠적금성(七赤金星)의 수상 역시 4와 9다. 팔방토성(八方土星)의 수상은 5와 10이며, 구자화성은 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행구기점법의 간단한 도식이다. 그러나 참으로 오묘한 비밀은 당시로선 알 수 없었다.

호리녀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녀는 돌침상 위에 몸을 뉘며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일우의 손목을 잡아끄는 그녀의 몸짓은 바야흐로 [황제택경]이란 비밀의 문을 더듬어 갔다.

구결(口訣)은 은밀한 용어로 이루어지듯 [황제택경]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여인의 은밀한 부분은 여덟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집을 떠나 죽은 자의 집으로 비유할 수 있었다. 왜일까? 그것은 사내의 힘이 당당하게 입실했다가 결국은 빈사상태가 되어 나오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제갈량을 다뤘다는 호리녀의 수법은 어떤 것일까.

일우는 비밀의 문을 열어가고 있었다. 돌 침상이었지만 짐승의 가죽을 놓아서인지 비단 솜이불보다 부드러웠다. 이제까지 호호탕탕 사내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던 호리녀는 돌침상에서 옷가지를 벗어던지자 뜻밖에 다소곳했다.

‘이 여자가 여우기 때문에 나의 정기를 빼앗으려 들겠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크게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고 싶었다. 천정 높이에서 빛을 발하는 구슬은 호리녀의 손짓에 따라 알맞게 빛 기운이 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