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보(棋譜)에 얽힌 얘기는 가을 채소처럼 다채롭다. 예부터 내려오는 대국도(對局圖)나 묘수도(妙手圖)가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애용되고 그것을 통칭 기보라 부르지만 [수서(隋書)]나 [당서(唐書)]에 보이는,

<棊圖勢竹園仙棊圖王積薪金谷園九局圖唐積績圖棊勢論幷圖徐鉉棊圖義例大宗棊圖韋琔棊圖···.>

이런 용어들을 보면 한결같이 오늘날의 ‘기보서(棋譜書)’를 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전인 정친정천황(正親町天皇)의 천정(天正) 10년 6월 초하루에 그 당시 집권자인 직전신장(織田信長) 앞에서 뒷날 본인방 1세가 된 일해(日海)와 녹염리현(鹿鹽利賢)이 둔 ‘3패빅’이란 본능사의 대국보가 전해온다. 이날 흉측한 일을 당해서인지 ‘3패빅’은 불길한 것으로 알려지게 된 동기를 가져왔다.

그런가하면 [기경(棋經)]이란 게 있다. 일종의 묘수집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모양에 이름을 붙여, 삶을 도모하고 죽음의 비수를 들이대는 모습이 요즘에 와서도 바둑을 사랑하는 동호인들의 마음을 울컥 잡았다 놓는다.

위기도(圍棋圖)라 하여도 정공(正功)만을 고집하는 것만은 아니다. 소림쾌선(少林快禪)같은 고수는 요즘말로 싸바르기의 명인이었다. 적절히 상대의 말을 사석(捨石)으로 이용하여 철벽을 쌓아 쉽게 결정지어버린 ‘사석작전의 명인’이었다.

이러한 기보를 전하는 내용에 [위기도(僞棋圖)]라는 게 있었다. ‘위(僞)’ 자는 거짓을 의미하는데 과연 그런 의미의 기보가 존재하는 것일까? ‘십궁희(十宮姬)’에 도전하는 네 번째 여인 금련(金蓮)은 그 사연을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소전(小田)과 웅인(雄人). 이들은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였다. 사는 마을은 서로 떨어졌지만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큰일 날 사람같이 얼굴만 맞대면 들로 산으로 쏘다니다 열다섯이 넘어서야 바둑이라는 걸 배웠다. 초급을 넘고 중급을 지나면서 두 사람은 각기 동네바둑의 고수를 자처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는데 덕식과 미모를 겸비한 직리자(直理子)라는 처녀에게 청혼을 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처녀를 먼저 만난 것은 웅인(雄人)으로 지난 해 여름 장마비가 쏟아질 때였다. 소전의 집으로 가던 중, 벼락이 떨어진 고목 가까이에서 헤아릴 수 없이 기어나오는 개미떼를 발견하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폭우가 그치긴 했으나 고목 근처는 물 웅덩이가 생겨났고 많은 개미들은 그곳에 빠져 다리를 저으며 가살거렸다.

보다못해 웅인은 자신의 손을 펴 개미들을 오르게 하여 건너에 있는 낡은 사당(祠堂) 안에 넣어주었다. 빗발이 거칠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개미들을 모두 옮겨주고 한쪽으로 기운 처마 밑에서 빗발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사당에서 나오던 노스님이 그를 향해 덕담을 건넸다.

“참으로 사람의 운수는 알 수 없네 그려. 젊은이가 수많은 생명을 구했으니 그대에게 닥친 살겁(殺劫)이 피해갔도다. 그대의 현궁(玄宮)에 낀 살기가 사라진 것은 미물을 사랑한 그대의 마음을 부처님께서 받아들인 것이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웅인에게 스님은 품속에서 조그만 책자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이건 위기도(僞棋圖)일세.”

“위기도?”

“바둑에 관한 서책으로 정공법(正攻法)을 다룬 것이 아니라 암수(暗手)나 속임수 같은 것을 모아놓은 것이네. 자네의 상(相)을 보아하니 이 책이 반드시 필요할  같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책장을 넘길 때에는 손가락으로 넘겨선 안 되고 반드시 젓가락이나 실장갑을 사용하도록 하게. 자세한 것은 차차 알 것이네.”

그 말을 하고 노승이 떠나버리자 빗발이 조금 거칠어졌다. 그때 아랫길에서 올라 온 스물 가까운 처녀가 사당의 처마 깃을 찾아들었다. 빗속이라지만 한 떨기 백합이 함초롬히 비에 젖은 듯한 담정(淡淨)한 자색은 웅인의 마음을 헤집어놓기에 충분한 미모였다.

“소녀는 직리자(直理子)로 건너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빗길에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괜찮으시면 소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웅인이 그녀를 부축하여 당도한 집엔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지금 소녀의 집에서 위기대회(圍棋大會)가 열리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