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궁희(十宮姬)에 도전하는 두 번째 궁인이 비취(翡翠)였다. 그녀는 얘기의 초점을 당(唐)나라 때로 잡고 당대의 고수 왕적신을 화제의 인물로 내세웠다.

시절은 6대 임금 현종(玄宗) 때로 돌아간다. 그의 이름은 융기(隆基)로 학문과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정치에 힘을 써 ‘개원의 치’를 구가한 명군이다. 그런데 무슨 귀신이 씌웠는지 재위 45년인, 만년에 이르러 정치에 싫증을 내고 사치와 애욕을 자행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가까이 둔 것일까.

어진 재상 장구령(張九齡)을 상갓집 찾아온 개 쫓듯 하더니 이임보(李林甫)를 기용하여 국정은 날이 길수록 문란해졌다. 현종은 총애하는 비 무씨(武氏)가 유명을 달리하자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 양옥환(楊玉環)을 귀비로 삼아 극진히 총애했다. 그의 일족은 영달을 꾀했으며 종조형(從祖兄) 양쇠(楊釗)에게 ‘국충(國忠)’이라 이름을 하사하고 이임보에 이어 재상에 임명했다.

유연(遊宴)을 즐겨 국비를 남용했으므로 세금이 과다하게 부과돼 백성들은 병든 강아지 이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으므로 절도사에 호인(胡人)들을 등용시켜 조정은 병마의 실권이 없어져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당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상태에 빠져버렸다.

하북성 영주 태생인 안록산은 중앙에 줄을 잘 놓아 평려의 절도사에서 범양과 하동까지 겸하였다. 이임보와 양귀비에게 잘 보여 동평군왕이 되었다가 국상 양쇠와 뜻이 맞지 않아 범양에서 반기를 든 것이다.

현종은 촉으로 도망하여 백여 리 거리인 마외파(馬嵬坡)에 이르렀을 때 반란군은 양국충과 양귀비의 제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의 사사(賜死)를 허락하기에 이르렀는데, 양귀비는 마외파의 불사에서 고력사에게 액살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얼마후 곽자의(郭子儀)가 장안을 회복하자 상왕(현종)과 숙종은 환도했다.

이러한 사연을 노래한 <장한가>는 백낙천이 이야기체로 쓴 낭만적인 서사시다. 제1단은 객관적인 서술을 제2단은 현종의 주관적인 애정을 독백 형식으로 읊었고, 제3단은 신비한 영계방문에 도인으로 바뀐 옥진(玉眞 ; 옥환)의 말이 포함되어 신비성이 물씬 풍겨난다.

이별에 즈음하여 간곡히 거듭 기탁하기를

말 가운데 맹세 있으니 두 마음은 서로 아니라

7월 7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인적 없는 곳에서 속삭이던 말씀

하늘에 있어서는 원컨대 비익조가 되고

땅에 있어서는 바라건대 연리지가 되리라

하늘은 길고 땅은 구원하여 모두 한때 있으련만

우리의 이 깊은 한 끊어질 리 없어라

참으로 애절하고 비통함이 그윽한 시다. 하늘에 있어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 있어서는 연리지가 된다.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씩이기 때문에 암수 한 쌍이어야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다. 또한 땅에 있어서는 연리지가 된다는 말인데, 연리지는 두 나무가 얽혀 죽을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림원에 왕적신(王積薪)이란 사람이 있었다. 현종 15년 6월에 안록산의 반군이 도성을 함락시키자 그 역시 피난을 떠나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촉(西蜀)은 지금의 사천성으로 산협이 워낙 험해 가히 호랑이 어금니라고 부를 만한 산세여서 걸음을 옮기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길을 잃은 왕적신은 기진맥진 밤길을 헤매다가 민가를 발견하고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한 것이다.

흐릿한 달빛이 송림 사이로 비쳐와 은한의 빛 그림자를 뿌릴 때 산감자로 허기를 떼우고 나서 왕적신이 물었다.

“이곳엔 두 분만 사시는 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며느리와 산수 간에 살면서 임천한흥(林泉閑興)의 즐거움을 아끼고 있습니다.”

왕적신은 정중하면서도 해박한 지혜를 감추고 있는 것 같은 노파에게 자신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노파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있는 숯으로 글자 하나만 써 보시지요.”

왕적신은 처음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다가 이내 알아차리고 숯을 집어 네모진 돌 위에 잠시 생각을 하다 ‘알 지(知)’를 썼다.

“지라는 것은 안다는 뜻이긴 하나 과녁(口)을 진리의 화살로 꿰뚫어야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우주만물의 이치를 알면 비로소 신인합일(神人合一)이 되는 셈이지만 화살은 세모꼴이니 이것은 독사의 머리를 닮아 어설픈 소인배들이 말을 함부로 해 상처를 입히지요. 돌아가시면 당분간 말을 삼가십시오.”

다시 글자 한 자를 써 보라고 노파가 말했다. 이번엔 ‘장기 기(棋)’를 썼다. 노파의 낯은 이번에도 심각했다.

“장기는 마음속에 근심의 판이 놓을 때마다 없어지지요. 차포마상(車包馬象)의 기물이 가득 놓였다가 점차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하나씩 없어집니다. 그러나 ‘바둑 기(棋)’는 마음 판에 근심이 갈수록 더해 가니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왕적신은 노파의 말에 얼이 빠져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바동거리는 듯한 자신의 신세를 정확히 찝어낸 탓이기도 했지만 흘러드는 달빛에 비친 노파의 얼굴이 너무나 고아(高雅)했기 때문이었다.

왕적신은 노파에게 인사하고 건너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잠을 청해 보았지만 마음이 산란하여 뒤척이고 있는데 안방에서 도란거리는 말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얘야, 할 일 없으니 바둑이나 한 판 두어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