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열된 여러 서책 가운데 화보용으로 눈에 띤 것은 3번 줄이었는데 책의 이름은 <신쥬(心中;しんじゅう>였다. 이것은 절망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혼자가 아닌 둘 이상의 자살을 의미했다. 훗날 <사의 찬미>를 부르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윤심덕의 경우가 정사(情死)를 의미하는 신쥬다.

이것은 일본에 유행병처럼 번질 때가 있었다. 일본 문화사를 통해 계급제도와 인간관계가 엄연히 규정된 도쿠가와 시대(17~19세기)에 많이 나타났다. 그 시대의 유명한 작가 차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이 쓴 160편의 희곡은 한결같이 비극을 다룬 대다수의 작품이 신쥬라고 할 정도로 로망과 대별(大別)되었다.

사회의 틈바구니, 엄격한 사회규범의 진흙탕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젊은이들의 죽음은 지금도 후지산 기슭의 바다와 같은 거대한 숲속, 이승에서 사랑을 얻지 못한 정사가 일어난다. 육도선생이 여느 화보집과는 다르게 양장본으로 제책이 된 그것을 집어든 것은 분명 ‘140음도’에 숨은 ‘보고 가오 보고 가오 나 보고가오’란 말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펼치자 가장 앞쪽엔 에도 시대 일본의 관료들이 조선을 정벌하자고 토론하는 모습의 <정한의논도>가 실려 있고, 화보에 등장한 여인의 설명은 한쪽 눈을 찡긋 감은 채 ‘어서 오라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명성황후 살해전문

책을 대여하여 한쪽으로 가져와 양장된 책의 앞 부분을 뜯어냈다. 양장본은 겉표지를 붙이기 전 위와 아래에 작은 구멍이 뚫린 세양사를 붙여야 단단해진다. 중간에 헤드반도를 붙이는 것은 낱장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여서 센 풀(본드)을 칠하기 때문에 쉽게 뜯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준비해간 면도날로 잘라내자 안에서 나온 것은 깨알같이 찍힌 글씨와 몇 장의 사진이었다.
첫 번째 사진은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다는 극비문서였다. 이른바 <에조 보고서>였다.

왕후가 시해된 후 1895년 10월 9일, 전날에 있었던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명 ‘여우 사냥’이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건은 그 전날인 1895년 10월 8일로 돌아간다. 일본 정부는 군인을 비롯하여 외교관 · 언론인 · 거류민 · 낭인 등으로 암살단을 구성하여 조선침략의 최대걸림돌인 명성황후 제거를 시행했다. 암호는 ‘여우 사냥’이었다.

그들은 광화문으로 들어온 후 무단 침임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를 잡아채 무리하게 주저앉혔다. 세자의 상투를 잡아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친 후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웠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 수비대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것이다.

이것이 육도 선생이 알고 있는 을미왜란(乙未倭亂)의 전부였다. 그런데 쓰노다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