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 아버지의 계책

다음날 임원철의 아들과 비구니가 집으로 들어서자, 잇따라 송장(送狀)을 든 사내들이 들어오고 때 아닌 송사가 열린다는 소문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근래 떠돌았던 풍문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요란을 떨자 감사 유천기는 좌중을 진정시킨 후  사내들을 앞으로 나오게 해 임원철의 재산을 취득하게 된 경위를 따졌다. 그들은 주위 사람을 의식해선지 집문서와 땅문서를 마구 흔들어대는 경박스러움을 나타냈다.

“그 문서는 누구에게 받았는가?”

“임원철입니다. 그 자가 누이의 병 치료를 한다고 이걸 맡기고 돈을 빌려갔습니다.”

“그럼 이상하잖은가. 어찌 문서에 ‘모든 재산을 후손에게 맡긴다’는 문구가 있는가?”

“그 자는 처음부터 자식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런 걸 받고 돈을 내준 것이지요.”

“문서는 그곳에 찍힌 도장과 쓰인 문구로 판정하기 마련이다.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본관은 임원철 주변을 탐문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그가 모악산 산자락에서 독사에 물려 죽어갈 때, 그는 문둥병자 부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은혜를 갚고자 문둥병 부부의 딸을 집으로 데려와 누이를 삼았으며, 뒤늦게 나타난 천형의 치료에 온 힘을 기울였었다. 겉으로는 그의 부친이 다른 곳에서 낳은 자식이라고 주위 사람들을 속였다.

그런데 이미 세상을 떠난 허달호라는 자가 이 집 아가씨에게 음심을 품고 담을 넘은 후 이 집 재산을 빼돌려 투전과 주색으로 탕진한 것은 전주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본관은 허달호의 죽음과 임원철 살해 사건을 조사하는 관장으로서 그대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문서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기를 명하는 바이다!”

느닷없는 명을 받아서인지 세 사내는 어안이 벙벙한 낯이었다. 없는 것도 획책하여 빼앗는 그들이 손 안에 들어온 집문서와 땅문서를 내어준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역시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이죽거렸다.

“하긴 그렇습니다. 나라 법이 지엄한 것을 어찌 저희가 모르겠습니까. 모든 걸 문서로서 판가름 한다는 것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희가 그 문서를 받을 때 임원철의 핏줄은 세상에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핏줄이 있다면 당연히 제 아비의 인장(도장)을 지니고 있겠지요. 그것을 사또께서 저희에게 증명해 주시면 이의없이 명에 따르겠나이다.”

예기치 않은 반격에 유천기 감사의 낯이 해쓱하게 변했으나 곁에 있던 탁일환이 웃는 낯으로 튀어 나왔다.

“그 점은 조금도 걱정 마십시오.”

탁일환은 곧 형방에게 준비한 물건을 가져오게 하였다.

하나는 임원철이 비구니에게 보관시킨 목기였고, 다른 하나는 몇 해 전 아내의 무덤을 열고 꺼내온 유골이 든 함이었다.

감영의 관속지에 묻어놓은 유골은 땅속에 묻혔지만 옻칠이 잘 된 탓에 먼지를 닦아내자 반들거렸다. 그것을 단 위에 올려놓고 형방에게 꺼내게 하였다. 유골은 어느 부분인지 몰라도 넓적한 부위였다. 때맞춰 탁일환이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들은 잠시 여길 보시오. 여기 있는 목기는 나무 술잔으로 제사를 지낼 때 그 위에 잔을 올려 놓습니다. 이것은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집안의 장손, 즉 후손된 자가 집안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임원철이 남긴 유골함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물건을 준비한 것은 먼 훗날 송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탁일환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목기(木器)를 집어 들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군중 속으로 걸어 가 윗부분이 잘 보이도록  잔을 뒤집었다.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술잔을 얹는 목기요. 그런데 묘한 것은 이 목기의 중앙에 큼지막이 점(丶) 이 찍혀 있습니다. 나를 비롯해 전주 감영의 유감사는 우연히 칠이 벗겨지고 먹 자국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자세히 살펴 본 결과 의미 있는 점(丶)이라고 여기게 되었소. 다시 말해 목기에 점이 직혀 있는 것은 하나의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목기는 그릇 (皿)을 나타내고 거기에 점이 찍혔다면 당연히 혈(血)이 되는 것이니, 임원철은 ‘피’를 나타내기 위해 목기에 점을 찍은 것입니다. 뭣 때문에 목기에 점을 찍었는가? 아니 왜 피(血)라는 것을 나타내려 했는가? 여기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이내 단상으로 돌아와 한쪽에 놓인 유골함을 집어 들었다. 즉, ‘피’는 이 유골에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우리 몸은 부모에게 받았다는 뜻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였소. 모든 자식은 아버지가 남긴 몸뚱이며 낳은 자는 어머니라 하였소.

[세원록]의 <험적골친법(驗滴骨親法)>에 의하면, 어떤 자의 해골이 있다할 경우 친생자를 확인하려면 해골 위에 당사자의 피를 떨어뜨려 친생인 경우는 스며든다 하였소!”

탁일환의 말처럼 동자승을 나오게 하여 검지를 찌른 후 새어나온 피를 뼈의 중앙에 떨어뜨렸다. 피는 순식간에 흡수되어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곤(困)’자 였다. 사각(囗)은 집안을 나타내고 그곳에 나무(木)이 있다면 풍수상 집안에 심겨진 나무였다.

탁일환은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나무 밑을 파게 했다.  발견된 것은 조그만 철제함으로, 그 안엔 임원철이 남긴 서찰과 인장(도장)이 들어있었다.

<···이곳을 사또께서 발견하였다면 아들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고 소인은 믿고 싶습니다.>

(제16화 · 1부 투정편 끝. 2부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