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저수지에 추락사한 허달호가 사람을 시켜 구한 고삼원은 아가씨가 원한 물건이었지요?”

“그리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닙니까?” 

“알고 오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물건은 저에게 소용되는 것입니다. 나의 운수 기박하여 천형(天刑)을 달고 태어났는데, 어릴 적엔 그것을 몰랐었지요. 그때 좋은 분을 만나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만···.

사람이란 게 몸이 불편해지자 마음자리에 병이 생겼습니다. 어떻게든 내 몸의 병을 고쳐볼 생각으로 우선 재산을 빼돌릴 궁리를 한 거지요. 그러던 차에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 허달호가 월장하여 겁간하려 하자 스스로 몸을 맡기고 흥정을 했답니다. 금산 땅에 가서 ‘고삼원’이란 약을 구해 달라구요. 약의 진위(眞僞)를 알려면 모악산 등성이에 자리잡은 문둥이를 찾아가 먼저 시험해 보라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탁일환은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허달호가 움막 가까이 갔을 때, 자네의 배 다른 오라비와 만났는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순검께서 아시는 것처럼 임원철은 저의 배 다른 오라비가 아닙니다. 그 분의 부친이 우연히 산행에 나섰다가 독사에 물려 죽게 된 것을 저의 부모님이 발견하여 목숨을 구하게 된 게 인연이었지요.

그 분은 나의 부모님이 천형을 앓으시는 걸 보고 저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부모님의 반대를 물리치고 목숨을 구한 대가를 치르려 한 게지요. 그때는 저의 몸에 천형 증세가 나타나기 전이었으므로 이곳까지 따라오게 된 거지요.”

“그럼 임원철의 살해 현장에 있던 문둥병자들이?”

“그렇습니다. 제 부모님입니다.”

“?···.”

“그 어른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세상을 버릴 때 저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벙어리냉가슴 앓듯 답답한 심정이었지요. 우연히 허달호가 담을 넘어 이 집에 뛰어들었습니다만, 그 자는 내가 천형을 앓는 걸 눈치 채고 협박했습니다.

크고 작은 일을 만들어 이 집 재산을 빼앗아갔고, 근자엔 이름 모를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와 임원철의 도장을 내놓지 않으면 내가 천형을 앓는다는 걸 관아에 알리거나 이 집을 불태운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천형을 치료하기 위해 ‘고삼원’이란 약재가 필요하다고 하여 그것을 구해 오면 도장을 내어주겠다 발뺌한 것인데···, 그 자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허면, 재산을 빼앗아 간 무리들이 지금도 협박하고 있단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이제 재산은 한 푼도 남아있질 않습니다. 있는 건 이 집 한 채 뿐인 빈껍데깁니다. 그나마 이 집도 내일까지 깍정이패들(악덕 사채업자)에게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처집니다.

이 댁 어른은 이런 일을 짐작하셨는지 아드님을 모악산 귀신사에 동자승이 되게 해 세속의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천형을 앓는 저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 쓰셨지만 소득이 없자 무척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하늘의 벌을 받은 내가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집안의 모든 재산을 빼앗겼으니 그게···.”

그녀는 한동안 복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리더니 잠시 후에 뒷말을 떨구었다.

“저의 오라버니, 그러니까 이 댁 어른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너무 어려 집안을 꾸리기 힘드니 모든 재산을 나에게 맡긴다구요. 그래서인지 제게 있던 모든 문서엔 ‘모든 재산을 마땅히 후손에게 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지금 와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 자들은 힘 있는 자가 뒷배에 앉아 있으니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자들의 힘을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탁순검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나라에서는 나병(癩病)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들이 팔을 걷고 처방약을 만들고 있습니다. 분명 머지않은 날 치료약이 나오리라 봅니다. 아가씨께선 힘들더라도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 들을 겁니다.

한가지, 아가씨께 전해 줄 말은, 내일 깍쟁이 패에게 이 집을 넘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들이 집문서를 들고 와 이행하기를 청한다면 관아에서 해결할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당장 하루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문간 어림이 왁자하더니 턱밑에 수염이 수북한 사내를 앞세우고 서너 명의 깍쟁이 패가 집안으로 들어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어찌 된 게야? 집을 비워주기로 했으면 당장 그리해야지 두더지처럼 웅크리고 있으니 무슨 꿍꿍인가 말이야! 우리가 집안을 뒤집어 놓아야 말을 들을 것인가!”

그들은 왁자하게 떠들어대다 몸채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뜻밖에 그들이 감사 유천기를 비롯하여 낯선 사내와 관병들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허드레를 떨었다.

“관아로 사또를 찾아가려 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돼 다행스럽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온 것은···.”

“그렇잖아도 이 집을 찾겠다는 송사가 감영에 들어와 사실을 확인하려 우리가 나섰네. 내일 오전 이 집과 연관 있는 모든 재산에 대해 송사를 열 것이니 문서나 간증자(干證者 ; 증인)가 있으면 이곳으로 데려와 사실 유무를 확인 받게. 이후엔 이 집 재산에 대해 어느 누구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