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곧장 자보묘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장선인(張仙人)이라는 오십객 도인을 만나 답답한 마음을 끄집어냈다. 자신이 은애하는 처자가 이곳에 들려 명화책에 마음을 풀어놓았는데, 자신의 마음을 옮겨놓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탄식이었다.

필사(筆寫)한 내용을 놓고 선비는 마음을 바짝 엎드렸다.

“이곳 자보묘가 영험하다는 건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장선인 님의 도력이 신령하다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잘 알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여길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생은 한 처자로 인해 마음의 병이 깊어졌는데 우연찮게 이곳에 들려 명화책을 넘겨보니 뜻밖에 ‘메꽃(선화)’이라는 아가씨가 탄식하는 내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해서···.”

장선인은 이마가 꿈틀대더니 눈매가 서늘해지며 문밖을 향해 냅다 호통이었다.

“너는 어찌하여 방문객들의 기록을 함부로 보여주느냐!”

이곳 명화책에 쓰인 선남선녀들의 마음자락을 함부로 다른 이에게 보여줬다는 호통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을 옥죄며 엎드리는 선비를 지그시 바라보며 장선인은 안타까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선비께서 마음에 둔 아가씨는 함부로 사랑해선 안 될 처잡니다. 아니지요, 그 처녀를 사랑하려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할 정도로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처녀의 부친은 한양에서도 호랑이로 소문난 형조정랑 박한구란 분임을 선비께서도 잘 아실 것으로 봅니다.”

형조정랑이라는 벼슬자리가 큰 것은 아니라도 소문이란 구르다 보면, 또 하나의 소문을 잉태하기 마련이어서 조금씩 살점이 붙기 마련이다. 성격은 괄괄하여 가까이 가기가 어렵지만 아내가 세상을 뜬 지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홀로 살아온 청렴한 관리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선비님이 명화책 내용을 필사한 것은 엄한 추궁을 받을 일이지만, 젊은이다운 뜨거운 피가 선비의 걸음을 이곳으로 가게 했고, 붓을 잡은 손이 내용을 필사했으니 이 모든 허물은 ‘여인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겠지요. 허나, 형조정랑의 눈길이 사납고 손속이 매섭다는 것은 전주에 사는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소이다. 아차 실수하여 아가씨를 은애하는 일이 발각이라도 나면 큰 봉변을 당할 것인데 그걸 아는 내가 막지 않을 수 있겠소.”

“아닙니다, 선인님. 시생이 설혹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아가씨를 은애하는 마음은 버릴 수 없습니다.”

희미하게 나타낸 윤곽은 ‘선화’ 아가씨를 만나 말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기대였다. 장선인의 말이 무심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또 궁금한 게 있소이다. 선비님께선 장가를 가셨습니까, 아니 가셨습니까? 이것은 절대 속이면 안 되는 일입니다. 장가를 가셨다면 가셨다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그리 말씀하셔도 됩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조금이라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장가들기 전입니다. 집안 어른들은 내가 어릴 적에 상대를 정한 정혼녀가 있어 내년에나 혼례를 치른다지만 아직은 잘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사는 일인데 어찌 일 년 후의 일을 마음에 새기며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선비님께선 어떻게든 선화 아가씨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것이군요. 스스로의 몸이 어찌되든 그 아가씨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쌀 세 가마니를 구할 수 있는 돈을 가져 오십시오. 내가 방법을 일러주겠소."

안색이 밝아진 선비는 즉시 품속에서 쌀 세 가마니의 돈이 들어있는 붉은 주머니를 꺼내 장선인에게 건넸다. 그는 잠깐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합장하며 혼잣말로 웅얼거리더니 옻칠이 잘 된 문갑 안에서 한 뼘쯤 되는 붉은 초 한 자루를 내놓았다.

“선비께서도 아실 것이라 여기지만 혹여 실수라도 생기면 큰일이기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화 아가씨는 천성적으로 월궁(月宮)의 항아 아가씨의 심령을 받은 고로 이틀 후인 보름날 밤이면 마음이 더 없이 심란해집니다. 평소 이 날에 대한 취약점 때문에 한양에 사는 그의 부친은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의원을 보내 마음이 요동하는 걸 막거나 본인이 직접 내려옵니다. 그럴 때면 이곳 자보묘에 들려 신험이 내리기를 기원하곤 하지요.

이곳 자보묘엔 신령한 물건이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은 황촉(黃燭)입니다. 이 황촉을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화 아가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나 만에 하나 삐끗하여 잘못된 날이면 선비님은 물론 이곳에 있는 시생까지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황촉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흔히 남녀가 혼약하여 첫날밤을 치르는 것을 화촉동방이라 합니다. 함께 들어있는 남녀의 몸에 환히 불을 밝힌다는 뜻이지요. 그 불은 동쪽에서 가져오므로 매우 신령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선비님처럼 혼약을 치를 입장이 못 되면 부득이 그 불을 빌려와 불을 밝혀야 하므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혼인(婚姻)은 밤이 늦은 시각에 예를 치르고 신방맞이를 합니다. 그 점에 착안해 저녁 9시 어림이 되면 아가씨 방문에 구멍을 뚫고 그 앞에 이 황촉을 켜십시오. 그리한 다음 대략 일각(15분)이 지나 지도리를 풀고 안으로 들어가시면 뜻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시생이 선비님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풍류놀이는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