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늦게 감영을 나간 오치환은 날이 새고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날 감영에 들어온 귀신사 비구니와 동자승은 손님맞이 방에서 탁일환 순검과 유감사와 마주 앉았다. 말문을 연 것은 쉰 살 남짓의 비구니였다.

“우리 인간들은 저마다 똑똑하고 지혜로운 듯 행동하나 그것이 반연(絆緣)에 의한 것임을 모르고 있기에 자신을 망치는 것은 한 치 앞을 바라보지 못한 욕심입니다. 그러한 욕심, 탐심의 벌레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이웃과 마을을 비롯해 나라까지 위태롭게 만들게 되는 반연의 ‘그릇’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잊고 지냅니다.”

비구니 스님은 나직이 아미타불을 외우고 나서 그녀가 소년을 맡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세 해 전이었지요. 소승이 탁발을 나섰다가 아이의 집에 들르게 되었을 때, 밖으로 나온 아이의 아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어요. 해서 소승이 물었지요. 인생이란 고작 육십년의  대나무 마디처럼 짧은 것인데 무슨 연유로 세상의 모든 일을 등에 진 듯한 얼굴이냐구요.
그랬더니 아이의 아비가 말하기를, 집안이 멸문 당하지 않으려면 아이를 절로 보내 절밥(중을 만듦)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야 머리카락 같은 아이 수명이 삼줄처럼 강건해 진다 했으니 그게 걱정이라 했지요. 그 분은 아이를 맡아줄 수 있다는 소승의 말에 탁발을 후히 내리고 물건 하나를 주었습니다.”

바랑에서 꺼낸 것은 기름종이로 꽁꽁 싼 두툼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풀어보니 흔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제기(祭器)로 술잔을 얹어놓는 나무로 된 목기(木器)였다.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는지 군데군데 흠집이 있었고, 잔을 얹어놓는 중앙엔 붉은 칠이 벗겨진 곳에 시커먼 먹자국 점(丶)을 하나 찍어놓았다.
달리 특별한 것이 없어 탁일환이 건네자 비구니의 말이 나직이 이어졌다.

“아이 부친이 기간을 정해 감영에 탄원하게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심심해서 그리 했을 리 만무고 분명 무슨 뜻이 있을 터인데···.”

“스님께선 아이와 감영에 머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런 줄 아시고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어 준비를 좀 하십시오.”

그들이 물러가자 다시 시장을 꺼내 초검과 복검관의 기록을 샅샅이 훑어보는데 뒤늦게 감영에 돌아온 오치환이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운을 뗐다.

“허달호와 어울렸던 자 중에 유씨 성을 쓰는 자가 있었는데 무척 고소해 했습니다.”

당시의 정경이 빠르게 오치환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한쪽머리가 약간 이지러진 유씨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시고 나서  평정심을 잃은 사람마냥 들떠 있었다. 누군가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그것을 가까이 있던 사내가 한마디 떨구었다.

“이제야 유가의 한이 풀렸나 보구만. 지난 가을 허가 놈에게 곤욕을 치르더니 이제야 마음이 좀 풀리겠어. 고놈의 허가가 술잔을 들었을 때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니까. 하여튼 십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시원하구먼!”

근자엔 허가의 걸음이 조선 땅을 떠도는 유기장이에게 향했다. 허가는 유기장이만 보면 그들에게 달려가 무슨 일을 꾸미는 듯 입술을 빼물며 소곤거렸다는 것이다. 오치환이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남의 시선을 채울만한 일이 아니었다고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입이 간지러운 그들이 그렇듯 말할 때엔 분명 은밀한 일이 숨겨있을 법도 싶었으나 내용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런가하면 시중의 잡놈들과도 곧잘 어울렸는데, 근자에 만난 최가는 서너 달 전에 유기장이 일을 그만 둔 이씨 집 사인(舍人)이었다. 그는 허가가 죽었다는 말에 품 안에서 두툼한 약봉지를 꺼내 땅바닥에 패대기치며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장사꾼들의 입살은 험하기 그지 없지. 그렇긴 해도 입이 무거운 쪽도 그들이다. 최가가 그렇듯 흥분한 걸 보면 가볍지 않은 연유가 있었을 터! 그걸 알아보았느냐?”

“자신을 찾아 온 허달호가 은밀히 구해 달라는 약재가 있었답니다. 물건을 구해 오면 삯을 후히 준다 하여 심부름을 한 것인데 그 자가 죽었으니 공염불이 아니냐고 노기가 대단 했어요. 소인이 막걸리 한 동이를 사 주고 그 약재를 받아왔습니다.”

오치환이 올린 약재를 받으며 탁일환이 물었다.

“너는 이 약재를 가까운 한약방을 찾아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알아오너라.”

오치환이 빠른 걸음으로 감영을 나가자 탁일환은 시장(屍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유감사에게 물었다.

“임원철의 배다른 누이는 어떤 여인입니까? 죽은 자의 친족들 기록도 명확치 않는 데다 관아에 얼굴 한 번 내밀지 않았군요. 아무리 병고로 고생한다 해도 임원철과 이복형제 아닙니까. 굴러온 돌이니 당연히 관아에 나와야지요.”

“사람을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했소. 관원들이 집에 찾아갔을 때도 본인은 얼굴을 내밀지 않고 아랫것들을 시켜 말만 전했었네. 중한 병이 몸에 침범했으니 손님 접대가 소홀하다고요. 그러니 그냥 돌아올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