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실이가 김씨 집안에 들어오기 전, 부인의 부탁을 받은 이창국은 한동안 고민했었다. 돌아가신 김판관이 세상을 떠난 풍수사 가족들의 뒷배가 되어 주라는 부탁을 했었고 보면,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짓은 그만두고 지금부터라도 다른 사람에게 원한 살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부인의 청을 받은 다음날 나이가 동갑인 이춘호를 만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내가 자네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할까 하네. 물론 부인의 절절한 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네만 어쨌든 잘 살아가게.”

그날 이춘호와 은실이는 신방을 꾸렸다. 그런데 다음날 집에 도착했을 때 엉뚱한 사단이 벌어졌다. 은실이 모습을 본 김진사가 그날 밤 자신의 처소에 집어넣으라 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누구보다 분개한 것은 이창국이었다.

“아무리 집에서 부리는 하속배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일이오.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또다시 불행을 만들려는 것인지. 이보시게. 차라리 은실이를 데리고 멀리 도망 가시게. 어디 가서 이집에서만큼 대우를 못 받겠는가.”

그게 아니 될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창국은 다그치듯 채근했다.

“이 사람아 떠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겠네만,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이니 어딜 간단 말인가.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 동안 공짜 밥에 글공부 시켜줬다고 세경 한 푼 쥐어주지 않았네. 그러니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집을 떠나면 딱이 굶어죽기 십상이네.”

이창국도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주인 나으리의 숙부되는 김판관이 살아있을 때, 남의 빚보증을 선 처가가 순식간에 망해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 그때는 집안일을 보던 때였으므로 이창국은 쌀 2백 섬에 해당하는 쌀값을 주인 모르게 빼내 처가를 도와 준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김판관은 도성으로 올라온 후,

“여러 해 전에 있었던 2백 섬의 쌀은 받은 것으로 할 것이니 그만 잊어버리게.”

그 말을 듣는 순간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며 감읍해 하였다. 그러나 그 어른이 세상을 떠난 직후 김진사는 그 일을 끄집어내 묘한 농담을 곁들였다.

“숙부님은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2백 섬의 쌀이 여느 집 강아지 이름인가. 잔소리 그만 두고 하루 속히 쌀값이나 변제하게.”

그러더니 어느 날은,

“자네 부인이 월나라 서시 같은 미모라는 데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언제 내게 보여 빚을 탕감 받게.”

이렇듯 색귀마냥 얼러대니 이창국은 그 동안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당할 수만은 없어 안방마님 권씨의 치마폭을 들춰 못나게도 색을 밝힌 계집의 음심을 채워주고 나름대로 주인나으리께 계집을 제공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들리는 말이 섬뜩했다.

“지금 나으리께서 이창국과 안방마님을 한꺼번에 엮을 심산이시니 머잖아 일이 나겠어.”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부인의 치마폭을 들추곤 했었다. 그러나 사정이 급하다는 것을 한시도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은실이를 주인 나으리의 처소로 들게 하던 날, 화가 극도로 치솟은 이춘호는 버티고개로 가는 길목에서 이창국을 기다렸다.

“자네가 나를 도와준다더니 주인 나으리께 내 계집을 상납하는 게 도와준 것인가. 그러고도 어찌 내 친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잖아도 잘 만났네. 내가 오늘밤 일을 치를 것이네. 그러니 자넨 안심하고 돌아가 있게. 자넨 주인 나으리가 벽장 안에 숨겨둔 함(函) 속에서 땅문서를 꺼내 숨기게. 훗날 자네와 내가 만나 나누면 될 일이야. 아시겠는가?”

어쨌거나 주인 나으리는 이창국의 칼을 맞아 절명하였고, 집안은 태풍전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 했지만 크고 작은 원한이 깊다보니 김진사의 죽음엔 잡다한 말이 떠돌았다. 안방마님이 사람을 시켜 살해 했다느니, 한양에서 온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날 밤, 장독대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던 이창국이 기찰 순검에 걸렸다. 놀랍게도 그가 쥐고 있는 건 칼이었다. 그는 향청으로 호송되자 딴청을 부렸다.

“몇 해 전 액땜을 하기 위해 장독대에 놓아둔 것인데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윤도백이 나서려는 것을 탁일환이 막았다.

“액땜을 위해서라면 그 칼로 무엇을 했다는 것이오?”

“그냥 놓아뒀습니다.”

“내가 보기로 이 칼엔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만.”

미지근한 물로 얼마나 칼칼하게 닦았는지 이창국은 자신있게 대꾸했다.

“피? 피는 무슨 핍니까!”

탁일환은 즉시 향청의 사람들에게 숯불을 피우게 한 후 칼을 달구었다. 칼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준비한 고농도의 초(醋)를 들이부었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칼날에 선명하게 핏자국이 나타나자 그제야 고개를 떨어뜨리며 주섬주섬 털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이번일은 이춘호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곁에서 부추기지 않았다면 어찌 주인 나으리를 살해할 생각을 품었겠습니까. 이춘호를 잡아들이면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관원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집에 없었다. 주인댁 벽장에서 꺼낸 함 속에는 온갖 문권(文券)이 타 버린 재가 한움큼 들어있었다. 함을 싼 보자기 안에서 엉성하게 쓴 서찰 한 통이 사람들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이렇듯 못된 짓을 행하여 죽일 수도 있다 봅니다. 내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어찌 한시인들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해서, 한이 많은 재물은 소인이 저승으로 함께 가져가려고 불에 태웠습니다. 또한 이놈의 육신은 물속에 던져 고기밥이 되게 하여 지은 죄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까 하나이다.>

그러나 하루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소문이 고개를 들었다.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춘호를 닮은 사람을 만났다느니 마포 나루 어디에서 보았다느니 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인된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  <1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