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벌거벗은 수필(藥婆)

육파의 넷째는 약파(藥婆)다. ‘약’이란 글자는 금석문에서 단순하게 약이라 설명 했으나 이 글자를 파자하면, 사람이 죽은 지 이십년(艹)이 지나 관(木) 속에 든 끈으로 동여맨(糸) 주검이 백골(白)이 되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좋은 의미일 때는 ‘약’이나 나쁜 의미론 ‘죽음’이라는 의미다.

첫째 날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음란서생 노덕수(盧悳守)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이십 년이 조금 넘었으나, 그때만 해도 김진사(金進士) 집엔 마름 하나와 종년이 고작 한 사람뿐이었다.

노덕수는 마실에 나가면 동네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삿갓이 대동강물 팔아먹은 얘기라든가 계룡산에 들어간 선술(仙術)을 익힌 도사가 여신도 수십 명을 혓바닥으로 농락했다던가, 조선왕조 제일의 사기꾼 송병준이나 이완용 같은 손가락질 받는 매국노들이 득세하는 걸 침 튀기며 얘기할 때면 마을 사람들은 뭐 그렇고 그런 얘기라도 듣는 듯 시답잖은 표정이었다.

“저기 말입니다. 오늘은 이슬(露)에 관한 예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슬은 천지자연의 변화를 음양으로 응집시켜 떨어지기 때문에 여인네가 그걸 받아먹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답니다.

그렇다고 아무 이슬이나 먹어도 되느냐? 그건 아닙지요. 이슬은 먹어야 될 것과 버려야 될 게 있습니다.

밤사이 차가운 공기가 천지를 휩쓸면 이슬은 신의 축복인양 나무 잎새에 내립니다. 이것을 정성스럽게 모아 마시면 뱃속의 아기집에 정(精)이 모여 자식이 잉태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이슬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뱃속에 든 아기집이 오히려 해를 입습니다. 차가운 물방울이 햇살에 녹아버리니 어떻게 아이가 들어차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슬은 해 뜨기 전 마셔야 효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품을 하거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이젠 얘기꾼으로서의 명망도 마무리 지을 때가 된 것이라 스스로 인정했다.

이런 노덕수에게 관심을 가진 인물이 근동에 힘 자랑을 하는 김진사였다. 그의 힘은 황소 같은 뚝심이나 밀고 나가는 추진력에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재력이었다. 가을비가 소록소록 내리는 어느 날 김진사는 정중히 음란서생 노덕수를 청해 얘기를 들었다.

“내가 이곳 쌍갈문(쌍문동)에 산 지 오래 되었네. 이곳엔 도둑을 막기 위해 이문(里門)이 서 있어 쌍갈문이라 하였는데 저 아래 사람이 효성이 지극해 효자문 두 개를 세웠기에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은 쌍문동이라고들 하지.”

그러니까 김진사 말대로라면 효성이 지극한 그 사람은 지금의 창동우체국 부근에서 살았기에 근방에 열녀문 두 개를 세워 ‘쌍문동’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김진사는 평소 책을 많이 읽은 탓에 도학이니 선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그것을 시험해 보는 방법을 몰라 이제껏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 중원에서 선인(신선)들이 남긴 <석실비록>이란 책자를 보면 남자는 여자로 인해 명이 늘어날 수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고 했네. 과연 그런 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일세.

내 듣기로 자네가 사대부 집안을 전전하며 기기하고 묘묘한 얘기를 들려줬다는데···, 과연 그런 얘기가 믿음이 가는가 그 말일세. 아니 아니 믿음이 가느냐 아니 가느냐의 문제보다 어떻게 하면 장수를 누리며 즐거운 생활을 하겠는가 그 말일세.”

이 당시 김진사의 나이는 서른이 눈앞이었고 음란서생 노덕수는 그 보다 두 살 아래였다. 그렇게 만나 이십 년을 흘러왔으니 이젠 쉰을 바라보는 고지에 올라 있었다.

김진사의 얼굴이 환히 펴진 것은 회현동에 사는 숙부 집에서 보내온 ‘은실’이란 종년이 해거름녘에 도착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현동 2가 타락골의 남산 정맥은 거북이가 엎드린 것과 같은 복구형(伏龜形)의 길지였다. 이 터의 서쪽은 문강공 조말생의 집이고, 동쪽은 우의정 윤시동의 집으로 감여(풍수사)들은 두 집을 ‘좌우 눈의 혈’이라 불렀다.

그런데 김진사의 숙부가 살았던 곳은 회현동 2가의 ‘재산루(在山樓) 터’였다.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冑)가 태어난 곳으로 집의 위치가 범의 모양과 같아 붙여진 명칭이었다. 범은 본래 산에 있는 것이니 이 터의 이름이 ‘재산루 터’였다.

그의 숙부가 어떤 연유로 집안이 적몰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종년들도 친척집으로 보내 다소나마 도움을 주려하였다. 그런 이유로 회현동에서 이곳 쌍갈문 김진사 댁으로 온 종년 이름이 ‘은실’이었다. 종년이 닥치면 의례적으로 치룬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일러주었는지 늦은 시각 사랑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약주 한 잔 걸치고 방에 들어가자 은실이는 귀띔을 받은 대로 불을 끄고 김진사 옆에 모로 누웠다. 사실 김진사 생각은 예나 제나 변함이 없었다. 일단 종년을 집안에 들이면 돈이든 뭐든 값을 치룬 재물만큼의 값어치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계집의 모양을 보니 나이는 고작 이팔이었지만 뽀얗게 일어나는 솜털이 나이든 사내의 기력을 충동질하기 좋아 아랫도리가 묵직해지고 한결 기력이 들끓었다. 그동안 강정이니 정력이니 하여, 마신 약재도 적지 않아 계집의 속살을 더듬는 중 자신의 힘은 금방 폭발할 듯 부풀어 있었다.

사내의 혀끝이 닿자 여전히 계집은 ‘나으리, 나으리’ 하며 잦아지는 아양만 쏟아낼 뿐 응접을 한다거나 반항하거나 또는 거부하거나 적극적으로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김진사의 느슨하게 피어오른 불길이 확 일어나며 온 몸이 하나의 열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급기야 계집의 배 위로 올라가 은밀한 곳을 찾아들었을 때 계집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가 힘껏 앞으로 전진시키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를 듯 입을 벌린 종년의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죽는다고 사지를 비트는 계집의 고통 쯤은 아랑곳없이 마흔 아홉 나이에 걸맞은 방사를 두 번이나 치르고 혼곤한 잠 속에 빠져들었다.

하복부가 떨어져나간 듯한 고통을 겨우 참아낸 종년은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이내 혼돈의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악몽에 시달리며 비오듯 땀을 흘리다 첫닭 우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야 이년아! 주인 나으리가 새로 온 종년을 찾으실 것이니 오늘밤 네가 들어갈 것이야. 나으리가 어찌 나오든 거부해선 안 돼! 만약 그런 행동을 했다간 너를 비롯해 우리까지 곤욕을 치를테니까. 나으리가 하는 대로 참고 일을 치르되 첫닭이 울면 나와야 해. 안방마님이 아는 날엔 네 년은 뼈도 못 추릴 것이야. 알았어? 첫닭이야, 첫닭!”

사랑채를 찾아갈 때 이 집 종년 팔금(八今)이가 들려준 당부이자 경고였다. 첫닭 우는 소리에 맞춰 겨우 몸을 일으켜 벗어놓은 고쟁이와 적삼을 집으려 주섬주섬 손을 움직였다. 옷가지는 잡히지 않고 무언가 끈적한 게 손끝에 묻었다. 피였다. 불을 켜니 이부자리는 온통 피 범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