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배 입에선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였다. 당장 갚지 못하면 거처를 한양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일을 하여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얼마나 그 자에 대해 분노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자는 평생을 벌어도 내게서 가져간 옥답 이자도 갚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놈은 수완이 좋았어요. 2년도 못돼 내게서 가져간 옥답의 반 이상을 갚더니 불쑥 개화산 암자를 찾아와 개성 상인이 발행한 어음 한 장을 내미는 게 아니겠어요. 그거 하나면 남은 돈과 이자를 제하고도 남을 만큼 큰 액수였어요.

그날 암자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독사(毒蛇)의 독은 계란의 노른자위로 풀린다구요.”

장율하가 씨익 웃었다. 술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 나서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부인의 살해범으로 최의원을 의심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어머님 말씀이 한밤중 별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이른 새벽 그 방에서 사내가 뛰어나가는 모습을 사월이가 봤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믿었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아내가 목을 매 자진하였다는 걸 믿고 싶지가 않았어요.

날마다 술에 절어 지내는데 어머니가 예쁘장한 계집아이를 집에 데려왔어요. 정향이라는 아인데 최의원의 먼 친척되는 조카라더군요. 어머니 곁에서 시중 들며 지내기에 나는 개화산의 암자에 와서 지내곤 했는데, 그곳 약수는 효험이 있어 병자들이 물을 뜨러 많이 왔었거든요.

어느 날 정향이 어머니 심부름으로 나를 찾아와 돌아가는 길에 큰길까지 바래다 주었는데 길거리에서 점쟁이가 좌판을 펼친 채 파자점(破字占)을 치고 있지 않겠어요. 그걸 보고 정향은 그 점쟁이에게 파자점을 쳤는데 어찌된 셈인지 점쟁이는 백지에 글을 쓰지 않고 하나후다(花札;일본 화투)의 12월을 뜻하는 ‘비 피’의 뒷면에 봄 춘(春) 자를 쓴 뒤, 정향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어요.”

그것을 이창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암자로 돌아왔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시장(屍帳;검시기록)을 수없이 살폈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밝힐 수 없었다. 정향이와 술김에 몸을 섞고 한 집에 지내게 됐지만 그렇다고 아내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더니 세 해가 지났다. 이제는 가끔 생각날 뿐이었는데 느닷없이 격쟁(擊錚)이 일어난 것이다.

“아내의 무덤에 이변이 생겼다는 것은 주검이 있는 곳에 ‘비 피’라는 하나후다(花札)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정향이년을 다그쳤더니 아내를 살해한 것은 어머니랍니다. 부정한 짓을 집사람에게 들켰나 봅니다.

물론 이 일에는 최의원이 개입됐지만, 그 놈은 자신이 의심받을 것을 생각해 이곳 삼화루 유곽에서 몸을 파는 정향이 년을 꼬드겨 자신의 조카로 만든 뒤 일을 꾸민 거죠. 물론 후일에는 나까지 살해해 우리집의 모든 걸 제 놈이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구···.”

“가만, 가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정향이라는 여인에게 점괘를 준 점쟁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몇 해전 겨울, 집 앞에 쓰러져 죽게 된 것을 마침 저의 집사람이 발견하여 살려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아내가 보이고 이곳 개화산 암자를 가리키더랍니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와서 좌판을 벌였는데 글쎄 정향이 년의 낯빛에 내 아내의 얼굴이 겹치더랍니다. 그래서 ‘아, 요것들이 마음씨 좋은 그 분을 살해했구나’하고 ‘비 피’의 하나후다에 봄 춘(春) 자를 끄적여 그걸 아무도 모르게 아내의 무덤에 갖다놓으라 한 거예요. 그리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요. 물론 그 일은 최가 놈이 했겠지요.”

“봄 춘자는 어떤 뜻입니까?”

“그건 삼(三)과 팔(八)로 나누어지고 아랫부분이 일(日)이니 모든 것은 38개월 후에 드러난다는 뜻이랍니다. 저승에서의 1일이 이승에서는 한 달 이라나요.”

장율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이창배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모든 상황을 내가 알아버리자 최가놈은 내 어머니와의 불륜을 물고 늘어졌어요. 언제나 윗자리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모양을 취했고, 실눈을 뜬 채 나를 조소했어요. ‘네놈이 나를 고변하면 네놈 집안도 끝장난다’는 그런 눈빛 말입니다. 놈이 어머니를 비롯하여 나의 앞길까지 막겠다는 협박이었으니 결국 최가놈이 원하는 대로 토지문서를 내주기로 결정할 수밖에요.

해서, 문서를 들고 그 자의 집을 찾아가 작설차를 마시던 중 양금화(洋金花;민 독말풀)를 정제한 가루약을 놈의 찻잔에 풀었습니다. 물론 그 약은 예전에 놈이 내게 준 것이었어요. 토지 문서를 꺼내자 놈은 반색하며 그것을 받으려 했지만 그러질 못했어요. 사지가 마비되기 시작했으니까요.

놈을 바라보면서, 네놈이 내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고 내 아내를 죽인 방법으로 죽이겠다 했더니 공포에 사로잡히더군요. 그래서 놈의 배꼽에 침(針)을 박고 밀랍해 버린 거죠.”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지나친 욕심으로 인한 폐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불급(不及)이 유어태과(猶於太過)’라 했다. 넘치는 것보다 부족함이 낫다는 말이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이 죽은 사건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모든 정황은 알겠소만, 나라 법은 지엄한 것이오. 최의원의 죄는 더없이 간악하나 그렇다고 이선비의 행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 범인을 알았다면···.”

장율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의 몸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했지만 의식의 끈은 끊어져 버렸다. 그의 얼굴이 앞에 놓인 술상에 엎어지는 요란한 소리를 꿈길처럼 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