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든 것은 아침상을 든 며느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어느새 최의원은 돌아갔는지 구겨진 요와 이불자락만 눈에 들어왔다. 얼른 거울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비쳐보았다. 약간 피곤기가 있었지만 두 뺨은 도화색처럼 붉었다.

미소가 돌았다. 자신의 몸 어디에 그런 정열이 남아 있었을까. 그것은 찾아내지 못한 즐거움의 반조였다. 마씨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침 생각 없으니 상을 들일 필요는 없다. 것보다 네 남편이 어찌 지내는지 가봐야질 않느냐. 개화사에 들러 아범에게 집에 한 번 들르라 해라. 약이란 당사자가 지어야 효험이 크다 하지 않느냐.”

며느리는 곱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제야 마씨는 아직껏 타오르는 봉황이 조각된 황촉을 가만히 불어 껐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간 후 최의원이 찾아왔다. 역시 지난밤처럼 황촉을 밝히고 가볍게 분칠하여 얼굴을 매만진 후 준비된 술상으로 맞이했다. 한 병에 쌀이 한 섬이라는 가을의 명물 연꽃에 술을 넣어 그것이 어지간히 숙성되면 다시 백자 주전자에 따라 마시는 연화주(蓮花酒), 가을에는 일등주였다. 최의원이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마님, 음양가들이 마시는 술에, 대조주(大棗酒)가 있습니다. 마님 같은 여인네들에겐 아주 좋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대조라는 게 뭔가?”

“대춥니다. 동진 때 저술된 <습유기(拾遺記)>라는 책에 의하면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선인(女仙人)이 자신의 국부 안에 대추를 넣어 퉁퉁 불린 다음 서주 목왕(西周 穆王)에게 주어 기력을 회복시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사대부가의 기력 떨어진 사내들이 음기가 센 여자를 구해 국부 안에 대추를 넣게 해 그것을 꺼내 먹는 목밀녀(木蜜女)라는 비방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대갓집 마나님들은 대조주(大棗酒)라는 걸 마시며 기력이 떨어진 몸을 강화시키지요.”

“그것참, 여간 남사스러운 일이군요.”

최의원은 연화주 한잔을 들이켜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낙양의 한량들이 즐기는 ‘유엽주(柳葉酒)’ 놀이란 게 있습니다. 버드나무 잎새를 술잔에 띄운다는 의미로 화방(畵舫;놀잇배)을 타고 기녀들과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놀이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마님, ‘무풍불기랑(無風不起浪)’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버들잎을 띄워도 바람이 불어야 흔들흔들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이에 연유하여 유엽주 놀이는 여인의 몸에 술을 붓고 사내가 바람을 일으키는 놀입니다.”

즉, 여인의 몸에 술을 붓고 술이 흐르는 골을 따라 혀끝으로  핥는 놀이였다. 이 놀이가 어느새 조선으로 건너와 대한제국 초기에 한량들의 하룻밤 놀이로 인기를 끌며 자리 잡았다.

실로 20여년 만에 쩌릿한 맛을 본 마씨는 어떻게든 최의원의 환심을 사둘 필요가 있었다. 돌아가는 그에게 건네 준 것은 개성상인에게서 받은 백미 70석에 해당하는 어음이었다.

넷째 날 - 점괘와 독(毒)

경위원의 순검들은 한 자리에 모여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최의원을 살해할 때엔 아무래도 마취성분이 있는 약을 썼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일에 적당한 것이 바로 마비산(麻沸散)이었다. 이것은 마취제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명의 화타가 개발한 것이었다. 그것을 이용하여 누군가는 최의원을 마취시키고 배꼽에 침(針)을 꽂아 목숨을 빼앗았을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때 삼화루(三華樓)에서 일을 하는 쉰쯤으로 뵈는 사내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이걸 장순검님께 갖다드리라 해서 왔습니다.”

펼쳐보니 이창배의 서찰이었다. 사건에 대해 알고 싶으면 지금 삼화루로 혼자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부인의 무덤에 이변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절대 목을 매 죽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홀로 술을 마시다가 장율하가 나타나자 이창배는 그렇게 말했다. 건너편 자리를 권한 후 술 한잔을 따랐다. 잔을 받아 한모금으로 입안을 적시고 나서 물었다.

“최의원을 오래 전에 알았습니까?”

“그렇지요. 그 자는 대국(大國;중국)을 오가는 사람들과 손잡아 인삼을 밀반출하고, 그 대신 중국 황실에서 은밀히 사용돼 오던 <천금방(千金方;천가지 비방)>이란 처방첩을 받아 챙겼습니다. 그 무렵 나는 오랫동안 허한(虛汗) 증세가 있어 최의원의 처방을 받았는데 그건 탕약이 아니라 밀환(蜜丸;알약)이었지요.”

장율하의 뇌리엔 순식간에 하나의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국의 처방첩을 근거로 두 사람은 고관대작들의 시들어진 기력을 회복시켜 인기를 얻으면서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창배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자는 천안으로 낙향한 정한수 대감의 몸을 치료한 탓에 상당한 힘을 얻게 됐습니다. 나를 중앙 요로에 천거하겠다는 약속까지 얻어냈으니 가만있을 수 없어 개화산 인근의 5백석지기 땅문서를 바쳤지요. 그런데 최원기 그 자는 정대감의 청상된 딸과 놀아나는 것도 부족해 처방의 원칙을 깨뜨리고 정대감에게 과다한 비약 처방을 하여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것이 오석산(五石散)이란 처방이었습니다.”

중국 황실의 궁중 비약인 오석산은 돌의 화합물이다. 요즘의 비아그라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효능이 있었기에 수많은 궁인들과 놀아나는 황제에겐 다시없는 강정비약에 속했다.

그런 점에서 의성(醫聖)으로 통하는 손사막(孫思邈)은 <천금방>이란 처방집에 오석산을 잘못 복용해 중국 황실의 황제가 3분의 2가 요절했다고 지적하며 아편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오석산으로 인해 정대감이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최의원은 생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창배는 뇌물로 준 개화산 아래 5백석지기 토지를 날려 버렸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내놓고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최의원은 그때부터 이창배에게 목줄을 움켜잡힌 채 끌려 다녔다.

“이보시게, 내가 자네의 옥답을 정대감에게 주게 한 것은 고의가 아님을 자네도 알잖은가. 모든 걸 빼앗기고 겨우 목숨만 부지했으니 나를 믿고 기다리면 반드시 자네의 손해를 회복시켜 주겠네. 그러니 몇 해만 기다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