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겠습니다. 저희는 그 방을 살피고 돌아가겠습니다. 한데, 주인장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장율하는 품속에서 하나후다(花札;화투)를 꺼내 보여주었다. 해묵은 ‘비 피’의 뒤엔 ‘봄 춘(春)’자가 희미하게 윤곽을 나타냈다. 그것을 본 이창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앞뒤를 살피다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외면해버렸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부인의 주검에 아이의 태(胎)가 있었습니다.”

“태라니오?”

“부인께선 자신이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비관을 했겠지요.”

그 말만을 남기고 장율하는 다시 별당으로 돌아왔다. 사월이가 가져온 청사초롱을 건네받은 다인이 앞장 서 들어갔다.

김씨가 기거했던 이곳은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두 방은 미닫이 하나로 이어지고 중간 툇마루를 지나면 뒤쪽으로 다른 방이었다. 이집 며느리 김씨가 부정을 저질렀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은 바로 이곳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방은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봉창문(封窓門)이 있어 부정을 저지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각 방에는 특별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일이 3년이나 경과된 데다 부정한 여인으로 소문난 터니 잡다한 물건은 모두 불태워버렸었다. 그렇다보니 방안에는 이불 한 채와 헌 문갑, 낡은 서안(書案)과 호롱불 등잔, 그리고 거의 타 버린 황촉의 촛대가 놓여 있었다.

건너 방에는 반쯤 자수를 놓은 거북이와 학의 모양이 드러나 있었고, 거울을 비롯해 빗과 비녀등의 장신구가 한 곳에 놓여 있었다.

‘그것참 이상한데.’

장율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찾는 것은 김여인이 죽기 전 자양 강정에 필요한 약재를 구했다는 내용물이었다. 굳이 목을 매 죽을 사람이 자양 · 강정에 필요한 약재를 구할 이유가 없었다. 체력이 떨어지고 기가 허한 여자일수록 남몰래 그런 약재를 구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진(自盡)을 생각한 상황에서 그런 약재를 구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인에게 물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죽을 사람이 자양 · 강정에 필요한 약재를 구하려 했다는 게?”

“글쎄요.”

장율하의 빈정거림에 양보가 없었다.

“글쎄요라는 건 다모(茶母)가 해선 안 될 말이다. 정황증거만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없듯 내가 묻는 말엔 딱 떨어지는 답변이어야 한다.”

셋째 날 - 동보당 최의원의 죽음

다음날. 경위원에 나왔을 때 정문원은 동보당(東寶堂) 최의원이 죽었다는 얘기에 힘을 주었다. 시장을 작성하지 않았지만 연락을 받은 바로는 깊은 원한에 의해 살해된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살해 현장은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으니 지금 가도 늦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남의 얘기처럼 들려주었다.

“며느리 김여인이 광에서 목을 맨 것은 아무래도 꺼림직해. 대들보에 목을 맨 흔적이나 목의 상처를 기록한 시장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목을 맬 곳을 찾는다면 광이 아니라 김여인이 기거하는 뒷방이어야 하네.”

사건 현장으로 가면서 경위원에서 일을 하는 서리배 하나가 동행했다.

“자넨 동보당 최의원에 대해 들어본 것이 있는가? 약방을 하다 보면 이곳에선 방귀깨나 뀌고 다녔을 것 아닌가?”

“그렇습지요. 용하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침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만, 병자를 한번 보고 내린 처방이 백발백중이라 나름대로 신망도 얻었습지요. 가만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이창배라는 선비의 어머니 되는 마씨(馬氏)도 최의원 신세를 졌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뭣합니다만, 그 이참판댁 며느리와 정분이 났다는 말이 한동안 떠돌았으니까요. 나중에 밝혀진 것은 그 댁 며느리가 남편에게 주기 위해 오석산(五石散)이란 강정비약을 처방했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좁은 골목길을 타고 오르자 불을 환히 밝힌 대문이 나타났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분명했다.

장율하 일행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저희들끼리 귓솟말을 나누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서 이곳에 왔던 항인(行人;관아에 속한 길 안내자)이 안방으로 안내했다. 최의원은 앞에 놓인 서안 위에 얼굴을 처박은 채 거꾸러져 있었다.

즉시 시장(屍帳;검시 기록)이 작성되었다. 다인은 초검관으로 장율하의 이름을 적고 사체가 놓인 방안 정경을 그려 넣었다. 집안에 인척이 있을 리 없으니 굳이 시친(屍親;죽은 자의 친척)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시체를 눕히고 옷가지를 벗긴 후 준비해간 감초 즙으로 구석구석을 닦고 타박상 흔적이 있는 곳엔 파의 흰 뿌리를 짓찧어 넓게 펴 바르고 초에 담근 종이를 그 위에 덮었다. 이렇게 하면 상흔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처의 흔적은 곳곳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의원을 죽음으로 내몬 치명상은 아니었다. 왼쪽 가슴에 사선(斜線)으로 깊이 팬 흔적은 자상(刺傷;칼로 찌른 흔적)이 분명했으나 서리배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확인한 것과는 달리 장율하의 시장은 사인(死因)으로 보지 않았다. 최의원의 몸에 난 상처는 죽은 후 찌른 상처였으므로 백색(白色)이었다.

‘원한 때문인가?’

일단 주검을 경위원으로 옮기고 방안의 물건을 유심히 뒤적였다. 중국에서 건너온 값비싼 향초(香燭)가 문갑에서 여러 개 발견되었다. 기린과 거북, 학과 소나무 같은 십장생(十長生) 문양을 표면에 새겨넣은 향초는 한눈에 보기에 값이 나갈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 있었다. 사향을 넣은 향낭(香囊;향 주머니)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반지와 나비 모양의 장식은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때마침 용인 현감 이형갑은 최의원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경위원에 왔기 때문에 물목들의 특징을 기록한 후 이현감과 마주했다.

“자네가 용인 현감에 부임하기 전 김진사 댁 며느리의 자액(自縊)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걸 서리배를 통해 알았네. 자네가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네만···, 그래 최의원을 만나 무슨 일을 했는가?”

“개인적인 일이네. 다른 이윤 없네.”

장율하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는 것을 보며 이형갑은 무릎을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이미 상대방이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용인 현감으로 부임하기 전, 관내에 살고 있는 김진사의 따님에 대한 얘기를 아는 이로부터 들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사건을 파헤쳤는데, 누구보다 의심이 갔던 인물이 동보당의 최원기였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날 당시의 정황(알리바이)이 깨끗했고 이참판댁 며느리가 목을 매달 때 삼화루(三華樓)에서 마신 술에 그는 곯아떨어진 채였다. 아무리 털어봐야 먼지 하나 나올 것 없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의구심을 접었다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