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 - 모든 것은 사체가 말한다

상황이 묘한 쪽으로 전개되자 집안 식구들은 안도한 빛이 역력했다. 민호 대감은 아들을 잠시나마 의심한 마음을 되돌렸고, 잔뜩 독이 오른 민대감의 둘째 도령 민지운은 자리에서 몸을 솟구치며 화자허를 삿대질했다.

“그러니까 네놈이 누이 복수를 하려고 우리 집을 출입했다는 얘기냐! 네 이놈, 보아하니 우리 아버님과 불미스러운 일로 집안을 쑥밭으로 만든 걸 보면, 필경은 내 형의 죽음에도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친구라고 믿었던 정가 놈과 공모해 형수를 파멸로 몰아 떨굴 생각을 했다는 건 백 번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왠지 화자허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정도령 말에 따르면, 이집 둘째 도령이 제 형수를 은애하고 있다 하였소. 형님이 비명횡사했으니 손에 넣는 것은 마음먹기 달린 일이지만, 그래도 격식을 갖춰 첩실로라도 받아드리려는 것은 주위 사람 눈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소.”

“당치않은 소리! 이젠 허망한 말로 죄 없는 나를 물고 늘어지는구나. 아버님, 이놈들을 경위원에 넣어 물고를 내야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저 화자허인가 하는 놈이 정도령과 짜고 우리 집안에 똥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형수의 주검이 발견되던 날 저놈이 별당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아버님도 아시잖습니까.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저놈이 신발까지 들고 방안으로 들어간 것을요!”

“괜히 나를 붙잡고 엉뚱한 누명 씌우지 마시오. 나는 별당 아가씨가 오라 하여 들어간 것뿐이오.”

“그게 이상한 일이오. 형수님이 유곽에 있는 여인처럼 치마말기 함부로 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자허라는 당신을 불러요?”

결론 없는 소란스러움이 한동안 계속되자 장율하가 분위기를 정리하고 나섰다.

“나도 처음엔 화자허라는 김씨 성을 쓰는 얘기꾼을 의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분은 아무 혐의가 없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둘째 도련님의 행적이오 사건이 난 밤, 둘째 도령은 어디 있었소?”

“집이오! 책을 읽다 속이 안 좋아 바람 쏘이러 나왔는데 중문 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저 사람을 봤지 않습니까.”

“물론 그랬지요. 한데, 내 생각은 그렇지 못합니다. 별당에 있는 아가씨 방에 들어간 것은 둘째 도령이 먼저였소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간단 말이오?”

“조금 전 화자허께서 말씀하지 않았소. 도령이 형수를 은애하고 있다고. 그것을 정태현 도령에게 들었으니 틀림없는 일일 게요.”

“내가 형수를 좋아하는 것이 무에 문제란 말이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령의 마음이 문제요. 하루 전 도령께선 유월이를 통해 세 자루의 황촉을 별당에 보내 직접 촛대에 끼게 했소. 그 황촉은 ‘향초’라는 것으로 본시 두 가지 성분이었소. 하나는 미초(媚燭)라 하여 초의 심지에 음성의 강력한 흥분 효과를 묻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통 효과를 나타내는 마비산 성분이 있는 것이었소. 도령께서는 유월이로 하여금 그것을 별당에 꽂게 했는데 사건이 난 직후 그 초들이 사라져 버렸소. 도령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오?”

“세상에 그런 초가 있는지 모르나 난 아는 바가 없소이다.”

“물론 그렇게 말할 것이오. 황촉을 도령이 가져갔으니까.”

“내가 왜 그것을 가져갑니까?”

“별당의 사인은 파시를 함으로써 밝혀졌소. 우리 생각은 그렇소이다. 범인은 별당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으나 응하지 않자 곧장 난행으로 돌변했소. 상처가 워낙 미세해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배꼽 부근에 피가 맺힌 것을 보고 내상(內傷)이 있는 것을 알아냈소. 그곳에 내상이 있으려면 무언가 여인의 음문으로 침입해 칼을 휘저어야 하는데, 이렇게 할 경우 배 안으로 칼을 찔러 넣을 수 있기 때문이오. 칼끝의 간격이 깊었다면 핏자국은 없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도 칼끝의 간격이 얕아 배꼽의 상하 부위에 혈흔이 맺혔네.”

장율하의 눈짓을 받은 정문원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민지운의 호신용 장도(粧刀)를 그의 몸에서 꺼냈다. 장도에는 끝에 죽두(竹頭)가 달려 있었다. 그곳에 영초를 칠하자 순식간에 핏자국의 나타났다.

“이곳에 달린 죽두는 장식용 칼이지만 크기가 워낙 작아 이번 일에 사용했을 것이네. 더구나 이렇듯 핏자국이 반응했으니 도령께서 할 말 있으면 해보시오.”

민지운은 순간 섬뜩할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차가운 어조로 뱉어냈다.

“내가 그년을 본 것은 형님보다 먼저요. 어느날 문득 형수 신분으로 들어왔으니 마음에 담은 생각들은 잊어버렸소. 그런데 형님이 돌아가신 후 내 마음을 전했더니 당찮은 시구를 끼적이며 답시를 달라는 게요. 그년의 생각대로 내가 글을 못 써오자 이 얘길 전해들은 정가 놈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했소. 

어디 그뿐이오. 저 화자허란 놈도 그년의 은밀한 곳을 파고들었을 것이오. 며칠 전 정가가 쥘부채에 답시를 가져오자 그년은 이틀 후 몸을 허락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돌려보낸 걸 보았소이다!

다음 날 유월이에게 황촉을 꽂게 하고 별당에 들어갔는데 그 못된 년이 약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나에겐 죽어도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 화자허인가 반쯤 허리 부러진 작자나 정가 놈의 어디가 좋아 그런지 몰라도 그런 년을 살려둘 수는 없소이다!”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화자허가 자신의 바지춤을 밑으로 내렸다. 의당 덜렁한 물건이 흔들려야 할 곳이 여인네처럼 밋밋했다. 그는 이공공처럼 양물과 고환을 거세한 환자(宦者)였다.

<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