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단번에 반대를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말을 듣자 하늘에 뛰어오를 듯 기뻤다.
밤늦게 오동나무 앞에 섰더니 나뭇가지에 쥘부채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방으로 가서 펼쳐보니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였다. ‘긴긴 밤을 누구와 함께 보내랴’였다.

민지운은 즉시 답변을 휘갈겼다. 시구가 이규보 선생의 회문시 ‘미인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추각수미취(皺却愁眉翠)’라 운을 맞추었다.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였다.

그러나 문장의 맥을 보면 전연 엉뚱하다는 것을 민지운은 눈치 채지 못했다. 쥘부채를 전하고 몇 날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쥘부채는 담 너머 숲속에 내던져진 후였으니 답장이 올 리 만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형수의 그림자라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별당 근처를 배회하다 사람 그림자를 발견하고 쫓아갔다.

그날 담 아래서 쥘부채 하나를 주웠다. 거기엔 놀랍게도 이규보의 회문시가 끼적여 있었다. 위에 있는 시구는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이고 아래쪽엔 ‘수여도일장(誰與度日長)’이었다. 자신은 회문시를 순서에 입각해 다음 구절을 썼고, 누군가의 쥘부채엔 상대가 썼던 시구를 반대로 답시한 것이다.

민지운은 부채에 달린 죽두(竹頭)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 정태현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모른 척하고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듯 들떠 있었다.

“내가 첫 경험을 한 것은 사금(絲禽)이라는 아이였네. 본래 무당 집안의 딸로 신내림을 받기 싫어 도망쳤다 했는데, 그 계집이 나를 유혹하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는데 어찌나 영악한지 기생처럼 사내 후리는 요본 감창이 절경이더란 말일세. 그 아이가 오래도록 우리 집에 있었으면 심심찮게 몸을 풀 수 있어 좋았으련만 큰 무당이 죽는 바람에 뒤를 잇는다고 가버렸다네.

얼마 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 사람을 넣어 내 뜻을 전했더니 쥘 부채에 시구 하나를 써 보낼 터이니 답시를 달라는 거야. 그리하기로 했는데 그만 담을 넘다 쥘부채를 떨어뜨렸지 뭔가. 도대체 그 부채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그만 잊어버리기로 했네.”

민지운은 모른 척 시구의 내용을 물었다. 내용은 예상했던 것처럼 이규보의 회문시였다. 자신과는 달리 상대가 쓴 시구의 내용을 정태현은 뒤집어서 보낸 것이다.

다섯째 날 - 해묵은 사연들이 드러나고

장율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민호 대감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모든 정황이 둘째 아드님에게 불리한 증거들만 나오고 있으므로 큰 며느님의 사체를 파시(破視)하지 않으면 일단 잡아들여야 함을 명백히 밝혔다.

“허허허, 집안에 불덩어리를 놓아두었어. 두어 해 데리고 있다 좋은 사내 나오면 재취시킬까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어찌 알았는가.”

민대감은 허탄한 웃음을 뿌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제 오후 권문(權門;권씨 집안)에 사인(舍人)으로 있는 송가(宋哥)가 찾아왔었다. 세월이 하수상하고 한때 같은 밥상을 받았던 권문의 동역이고 보니 즐겁게 만나 한담이나 나눌까 해서일 것이다.

송가는 자신과 달리 권문에 들어와 책사(策士)로서 자리를 굳혔다. 눈을 감고 오 리를 생각하고 눈을 뜨면 십 리를 생각으로 달린다는 송가는 젊었을 적 영암의 월출산에 들어가 그 자신 진리라고 믿는 황노술(黃老術)에 심취했었다. 도력 20년! 이젠 세상에 나가 자신이 익힌 학문을 써먹어야겠다고 하산하여 권문에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 송가는 민호 대감이 뽑아든 ‘첨자(籤字)’를 보며 경고했었다.

“대감이 뽑은 것은 ‘오리 부(鳧)’잡니다. 오리는 새지만 결코 하늘을 날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하는 일이 결코 오래 가진 못합니다. 대감께서 쓰신 부(鳧) 자는 마치 털이 빠진 난새(鸞鳥) 같고, 어찌 보면 깃이 부러진 앵무새 모양이니 무엇을 하건 소득을 얻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첫 머리에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일을 풀려면 사냥으로 잡은 짐승의 수자만큼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액화(厄禍)가 찾아올 것이라 경고했다.

“송가 자네는 언제 보아도 듬직하이. 권문에 몸담았을 적엔 내가 함부로 나서는 것을 경계하더니 지금은 당시에 했던 살생에 대해 피할 방법을 알려주니 자네 같은 모사(謀士)는 없을 것이네. 고맙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자네 충고는 잊지 않을 것이네.”

다시 하루쯤 생각하고 경위원에 통보했다. 죽은 며늘아기의 몸을 파시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여인의 몸을 파시할 때엔 현장에 다모 다인이 참석하고 휘장을 친 뒤쪽에서 장율하가 사체의 상황을 묻기 마련이다.

파시를 하기 전, 몸을 감초즙으로 닦아내 몸 상태를 점검한 후 이내 준비된 법식대로 수술이 행해졌다. 악즙(惡汁)은 흐르지 않았지만 주검에서 풍기는 냄새로 보아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코 밑에 진마유(참기름)를 바르고 수건으로 근처를 가린 채 검험에 들어갔다. 이미 다인은 갯버들 나무껍질을 다리 쪽에 덮고 한 시간쯤 지나 떼어낸 상태였다.

“뭐가 나타났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엔 준비해간 백매(白梅) 껍질을 찧어 짓이긴 것을 골고루 붙여라.”

다시 한 시각이 경과해 물었다.

“무엇이 나타났느냐?”

“없습니다.” 

“닦아라! 다시 감초즙을 전신에 발라라!”

한시각이 경과 했을 때, 다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으리, 배꼽 부위에 혈흔이 보입니다. 맺힌 듯한 흔적입니다.”

“즉시 음문(陰門)을 살펴라!”

“예에?”

“음문 주위에 날붙이(刃物)가 출입한 흔적이 있을 것이다. 찾아라!”

다인은 내키지 않은 듯 무거운 신음을 흘렸지만 이내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으리, 음문에 베인 듯한 상처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