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 회문시(回文詩) 공방

민호 대감의 둘째 아들 민지운(閔智雲)이 다니는 ‘취도(醉道)’라는 사설교습소는 근대 학문의 초석을 닦았다는 신식학문의 선구자로 불리는 민무구(閔武垢)가 세운 교육기관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민씨 일문은 명성황후가 불귀의 객으로 사라진 후 그 위세가 시들했으나 백성들 가슴에는 아직도 살아 있어 가끔 명성황후의 여걸다운 풍모를 입에 담았다.

이곳을 ‘취도’라 한 것은 술을 먹어도 도를 지킬 줄 안다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는 자는 당장 이곳을 그만 둬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주장했다. 그렇다 해도 자식들을 이곳에 맡긴 부모들은 설사 못된 길로 가겠느냐는 근심 섞인 우려를 말한 이는 없었다. 그것은 민무구란 위인의 덕의 향기 때문이었다.

민무구가 신학문에 대한 조사를 해올 필요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거의 보름이나 되었다. 평소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른 탓에 서른 명 남짓의 학생들은 평소처럼 자기 학문을 연마하는 데 열심이었다.

스승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이른바 ‘정원(庭園)’으로 알려진 공자식 교수법이었다. 즉, 공자가 자신의 아들을 기거하는 정원에서 만났을 때, 잠시 물어보는 것으로 그쳤다는 교육 방법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묻는 이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는 교수법이었다. 이것을 제삼자, 그러니까 외래에서 온 스승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간에 묻고 거기에서 답안을 찾아냈다.

민대감의 둘째아들이 자신의 대화상대로 택한 것은 윤씨 성을 쓰는 태현(泰賢)이었다. 아마도 그의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붙여놓았으리라. 그런데 문제의 회문시 공방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석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은 오전 학습뿐이어서 일찍 끝난 터라 민대감의 둘째 아들과 정태현은 가까운 주루에 올라가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풍류객처럼 술상을 준비시켰다. 그곳에서 민지운은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보게 태현이, 내가 요즘 마음 걱정이 있는데 이걸 들어줄 사람이 없어 자넬 이리 청했네. 내년이면 이팔의 열여섯이니 우리를 젖비린내나는 어린 것이라 말할 사람은 없겠지. 더구나 자네와 나는 체신이 다른 사람 못지않게 장대하지 않은가. 그런데 말일세···.”

차마 말을 못하겠다는 것인지 말끝이 흐렸다. 정태현은 그 역시 한잔 술을 털어넣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는가? 할 얘기가 있으면 해보시게.”

“사실은 내가 은애하는 처자가 있다네. 물론 상대방은 내가 그런 마음을 지녔는지 모르지. 속은 바글바글 끓는데 애타는  마음 전할 길 없으니 이렇듯 몸과 마음이 말라가고 있네.”

“자네 마음을 전하는 길이란 여러 가지지. 아름다운 꽃을 선사할 수 있고, 신식 음악을 들을 수도 있지. 또한 자네가 글을 읽으니 이름다운 시를 써 전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시라···. 내 처지엔 그게 좋겠네. 하면 어떤 시가 좋을까?”

“글쎄···, 상대방을 은애한다 했으니 그런 시를 써야겠지? 그렇다면 이규보(李奎報) 선생의 회문시(回文詩)가 좋겠네.”

민지운 역시 이규보 선생은 알고 있었으나 회문시가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다만, 회문시가 시인들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기법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노력이라고는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친구인 정태현이 익숙하게 끼적인 ‘미인원(美人怨)’이라는 내용을 베끼는 데 주력했다.

장당체앵춘(腸斷啼鶯春)

낙화홍족지(落花紅簇地)

향금효침고(香衾曉枕孤)

옥검상류려(玉臉雙流淚)

낭신박여운(郎信薄如雲)

첩정소사수(妾情撓似水)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

추각수미취(皺却愁眉翠)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이 타는데

꽃이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덮었구나

이불속 새벽잠은 외롭기만 하여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누나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 같고

이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 같구나

긴긴 밤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

이규보의 회문시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민지운은 감지덕지하여 그날의 술상을 자신이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날 저녁 집에 도착해 중문을 벗어나던 차에 형수를 만났다. 형님과는 세 살 터울이지만 자신과는 동갑이었다. 그날따라 집안에 어른들이 한 사람도 없는 터라 자신의 마음을 술김에 내비쳤다.

“내가 형수님을 지금에 와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형님과 혼약하기 전부터 은애하고 있었어요. 형님이 장가를 안간 처지니 내가 먼저 장가가겠다고 나설 수 없는 일이라 그냥 이놈의 나이가 차기만을 기다렸는데 매파(媒婆)가 가져온 혼담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만, 그래도 한 집에 함께 지낼 수 있다는 마음에 자위하며 지금껏 지내왔습니다.
형님이 과장에서 동방에 입격하여 삼현육각 울리며 집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갑자기 놀란 말에 채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형수님, 형님이 없으니 제가 형수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형님 몫까지 잘 해드리겠습니다.”

그날 형수는 놀란 표정이었으나 일체의 대꾸가 없더니 돌아서던 길에 한 마디 뱉었다.

“오늘 늦은 밤 별당에 오면 방 입구에 있는 오동나무에 쥘부채 하나가 있을 거예요. 내가 쓴 시구 위에 답시를 써 주면 그것으로 내 마음을 정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