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 향촉(香燭)이 타는 시간

시구는 미인원(美人怨)이었다. 깊은 밤 미인 홀로 지내야 하는 원망어린 글귀였다. 제목은 그렇다 해도 글을 쓴 이는 고려조의 문신 이규보였다. 탁일환이 사념의 폭을 넓혀갔다.

“제 생각을 장순검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쥘부채에 쓰인 시구는 회문시(回文詩)로 사랑하는 남녀가 상대의 진의(참마음)를 알고자 할 때 위의 시구에서 한 행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시구를 보낸 쪽의 내용을 뒤집어서 보냅니다. 그러므로 쥘 부채에 쓰인 시구의 회문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규보의 ‘미인원(美人怨)’이란 글귀가 담 너머에 있었던 것은 본래 쥘 부채의 시구는 여인이 썼던 것으로 보이며 거기에 회문의 답장을 한 것은 사내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때, 쥘부채가 버려진 것은 답장이 잘못 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탁일환의 말에 따르면 여인이 썼던 첫 행의 시구, 즉 ‘긴긴 밤을 누구와 함께 지내며(長日度與誰)’의 회문 시는 ‘늬와 함께 긴긴 밤을 지내여 볼까(誰與度日長)’로 회문하는 것이 바른 법이다.
그렇다면 이 쥘부채는 누구의 것인가? 집안사람의  것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이날 유월이를 만난 다모 다인(多仁)은 근자에 집안 사정이 어떠했는가를 물었다.

“여섯 달 전 큰 서방님이 비명이 돌아가신 뒤 집안 분위기가 막막했습니다. 더군다나 나으리와 마님 사이도 여간 냉랭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점쟁이 여인으로부터 받은 경고를 남편이 무시했다는 데 있었으나 민호 대감의 생각은 달랐다. 점법이란 참으로 허랑하다는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주절거린 것으로 집안에 생긴 변고가 맞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전폭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이 아내 최씨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매듭짓지 못했다.

“모든 게 큰 서방님이 돌아가신 게 원인이지요. 그 일만 아니었으면 집안이 이토록 냉랭하지 않았겠지요.”

“자네 이름이 유월이라 했던가?”

“예에, 아가씨.”

“어제 별당에 계시는 큰 며느리 방을 청소했다 했는데 수상한 점이나 평소와 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는가?”

“다른 점이라면···, 아가씨께서 자신이 직접 청소를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외엔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청소만 해줬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청소를 하러 들어갔는데 평소와는 달리 내 뒤를 따라다니잖아요. 내가 물건을 도둑질이라도 할 것처럼! 무척 서운했지만 종년이 따진들 득될 게 있겠어요. 가지고 간 황촉(黃燭)만 촛대에 끼우고 돌아섰지요.”

“황촉이라?”

“불 켜는 초 말입니다.”

“자네가 항상 촛대에 끼는가?”

“아닙니다. 별당 아가씨께서 끼겠지요. 어제는 내가 가지고 간 데다 촛대가 비었기에 그걸 끼웠어요.”

“두께와 길이는 어느 정돈가?”

“길이는 어느 황촉이나 같겠지만 두께는 보통의 물건보다 두 배는 돼 보였어요. 황촉이 탈 때 그윽한 냄새가 나므로 ‘향초(香燭)’라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두 마리 봉황과 같은 새가 조각되어 있어 비쌀 거라 생각 했어요.”

“나두 본 적 있네. 그것은 일반 물건보다 다섯 배나 비싼 것이네. 아들을 잃고서도 부인께선 그런 것까지 마음을 쓰는구만.”

“아니에요. 그건 마님께서 주신 게 아니고 둘째 도련님이 주셨거든요. 이틀 전 별당 아가씨 방에 황촉이 몇 개 있는가 물으시고 다음날 황촉을 사오시더니 내게 갖다놓으라 했어요. 이상한 일은, 아가씨가 변을 당하고 그 방에 들어갔는데 세 자루의 황촉이 하나도 보이지 않던데요? 발이 달려 어디로 날아갔을 리 없고 어쨌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에요.
며칠 전 이른 초저녁에 중문을 지나 별당 쪽을 보았는데 불이 꺼져 있지 뭐에요. 불을 켤 초가 떨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작은 도련님이 황촉을 주실 때 내가 갖다 드린 거예요.”

다인의 보고를 받은 장율하는 다른 시장(屍帳)에 적혀 있는 검안서(檢案書)를 펼쳤다. 용인에 사는 노수영(盧秀鍈)이라는 자가 격쟁을 신청하여 복검한 용인 현감 이형갑(李炯甲)의 시장이었다.

<홀로 있는 여인을 겁간하기 위한 방법에 무슨 수가 있을까를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하였다.
그 하나는 마비산(麻沸散)이다. 이것은 사람의 정신을 미혹시킬 수 있는 약재로 예전엔 환자들을 수술할 때 이용했다. 마비산은 여섯 종류의 식물을 조제하여 환자를 전신 마취시킨다. 시중엔 침마취(鍼麻醉)가 유행하고 있는데 가끔은 양금화(洋金花)를 이용한 중약마취가 선을 보인다.
마비산의 주성분인 양금화는 ‘민 독말풀’이다. 삭과(削科)의 꽃을 피우는 이 식물은 우리나라 환경에 잘 자란다. 어느 곳에든 심어놓으면 스스로 종자를 떨어뜨려 이듬해 꽃을 피운다. 문제는 이 마비산을 ‘향초’에 이용한다는 점이다. 마비산으로 진하게 정제한 촉심(燭芯)을 마비산 물로 몇 번이나 우려내 그것을 사용할 경우 강한 중독 현상이 일어난다.>

상황은 이러했지만 유월이가 건넸다는 세 자루의 황촉이 나타나지 않은 이상 그것을 증명할 길이 막연했다. 그러나 향초가 켜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타들어갈 때 침입자를 정상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음란선생 화자허가 초저녁에 민대감과 대화를 나눴으니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7시에서 9시 사이인 술시(戌時) 어림으로 추정되었다. 그 시각에 누가 별당에 침입했는가? 일단 가까운 사람부터 소재증명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