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 새로운 증거, 선추(扇錘)

하루 전엔 파시를 해도 좋다는 말을 던지던 민호 대감이 어떤 일인지 다음날은 파시를 해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집안의 일이 밖에 알려지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네. 집안사람들 얘기론 그 화자허인가 하는 놈이 이충원(李忠轅) 대감 댁에서 사고를 친 모양인데 그 댁에서도 소문날 걸 생각하여 쉬쉬 입을 막았네. 그토록 흉악한 짓을 한 놈이 말 한마디 않고 쫓겨난 걸 보면 독종은 독종인 모양이야. 그렇듯 우유부단한 성격이니 음란서생이라는 풍설가 노릇을 하는 것이겠지만서두! 어험!”

일이 이쯤 됐으면 딱 부러지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싶었는데 화자허는 일체 입을 다물고 묵묵부답이었다. 민호 대감이  파시해선 안 된다고 했으니 함부로 칼을 댈 수 없는 노릇이라 일단은 현장을 돌아볼 수밖에 다른 방편이 없었다. 집안에서 몸채 쪽 청소를 하는 쇠돌 아범이 새로운 정황을 설명했다.

“이레 전인가 그날은···, 이놈이 이(齒)가 아파 집안 청소를 못할 때였어요. 낮엔 잠을 자고 밤엔 고통이 심한지라 도저히 한숨도 잘 수 없었어요. 가만히 있으면 고통이 심해 천천히 마당으로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였는데, 중문을 벗어나자 갑자기 담장에 올린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지 않겠어요. 해서, 가만 가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누군가 담장을 넘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그 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는가?”

“모르지요. 담을 넘어가는 뒷모습만 보았으니까요. 황급히 쫓아갔더니 이쪽에서 달려오는 낌새라도 눈치 챈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데 담장 아래 쥘부채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쥘부채? 어디 있는가?”

“다음날 도련님께 드렸지요. 도련님은 무척 놀란 표정이더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잊고 있었습니다만.”

“담 너머는 어디로 통하는가?”

“큰 길로 빠지거나 숲길이지요. 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어 숲을 뚫고 들어와 담을 넘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도 둘러보았네만 그런 것 같네.”

장율하는 주변을 스쳐보며 탁일환으로 하여금 담 넘어를 한번 돌아보는 게 어떠냐는 눈길을 주었다. 탁일환은 즉시 담을 뛰어넘었다.

“한데 말이네, 돌쇠 아범. 그 후론 담을 넘거나 들어오는 자를 보지 못했는가?”

“못 봤습지요. 작은 도련님께 말했으니 더 이상 이놈이 나선다는 게 격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구요.”

“알겠네. 한데, 별당은 작은 공간이 아닌데 아가씨가 청소를 할 리는 없고, 누가 청소를 하는가?”

“이틀에 한 번 부엌일을 하는 유월이가 합니다만, 요 근래엔 별당 아가씨께서 오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했답니다.”

“어젠 어쨌는가?”

유월이가 머뭇거렸다.

“어젠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하여 쇤네에게 청소를 맡겼습니다. 쇤네가 큰 방과 작은 방 청소까지 해줬습니다만, 아가씨께선 가능한 한 청소를 빨리 하라는 말씀이 있어 정성스럽게 닦지는 못하고 대충 먼지만 털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이가 청소할 때엔 촛대에 황촉이 끼어 있었느냐?”

“예에. 노란 황촉으로 새 것이었습니다.”

“두께는 어느 정도냐? 이 정도냐?”

장율하가 왼손 엄지와 검지로 굵기의 두께를 정하자 유월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물어볼 말은 더 없네. 일하러 가도 좋네.”

그때 담을 넘어간 탁일환이 돌아왔다. 그의 손엔 뜻밖에 쥘부채가 쥐어져 있었다. 선추가 달린 부채살엔 두 편의 글귀가 써 있었다. 두 사람이 쓴 것으로 생각될 만큼 시구의 서체는 완연히 달랐다.

  첫째 시구는 ‘장일도여수(長日度與誰)’이고 그 아래쪽 시구는 ‘추각수미취(皺却愁眉翠)’였다. 위의 시구는 ‘긴긴 밤을 누구와 함께 지내며’라는 뜻이고, 아래쪽에 있는 것은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