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 9개월 전의 미행(微行)

탁일환이 경기감영으로 떠난 뒤, 장율하 일행은 동관의 내시부를 방문하였다. 이공수가 쉰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지만 궁 안에 흘러다니는 얘기엔 죽는 순간까지 상감의 은총을 받았으며 내명부 소속의 여인들에게 선망 받는 인물이었음을 서관의 내시교관 추인한(秋仁翰)이 일러주었다.

“그 분은 벼슬자리가 상선(尙膳;종2품)에 이르렀는데도 결코 교만하지 않았으며 저에게도 여러 가지 도움이 될 만한 서적들을 주었습니다.”

이른바 성의학(性醫學)으로 불리는 역대 덕이 높은 도인들의 구름같은 행적을 적은 도전(道典)이었다. 모든 게 추인한에게 도움 되는 것들은 아니었고, 단지 성행위를 통한 남녀의 몸이 어찌 손상되고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이 성의학 교전엔 ‘치상(治傷)’으로 설명되었다.

그는 이 책자에서 한 가지 터득한 게 있었다. 충화자(冲和者)라는 정력이 절륜한 도인이 남긴 말이었다.

<본래가 정욕을 극한 정도까지 추구해서 색정의 향락에 빠지게 되면 반드시 몸을 망쳐 병에 걸린다. 이것은 무절제한 황음을 불러들인 값비싼 대가다. 애당초 색욕으로 얻어진 병이므로 이를 치유하기 위해선 이열치열의 성행위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숙취가 해장술로 풀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제왕의 모습에서 기력이 쇠해졌는지 평시와 다름없는지를 아는 것은 내관이 반드시 지녀야할 것으로 날곤충의 촉각(觸覺) 같은 것으로 설명했다.

사가와는 달리 궁에 들어오면 지켜야할 법도가 적지 않다. 특히 사내의 거시기가 없는 이들에겐 가장 중요한 것이 ‘위계질서’였다. 그것을 무시했을 때엔 어느 귀신의 손에 목숨이 도망갈지 몰랐다.

“추내관 보기엔 적이 있을 것 같았는가? 종2품 상선에 있는 자가 하룻밤 사이에 목이 졸려 살해되고 자액(自縊)으로 위장할 만한 배포 큰 짓을 저지를 위인이 있으리라 보는가?”

“나는 그 분이 살해당했다곤 믿지 않습니다. 장순검께서 그리 말하시니 살해당했다 생각하나 개인적인 소견으론 살해당할 이유가, 또는 그런 일을 당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면, 근래 그 분과 다툼이 있거나 원한 살만한 사람이 없었는가?”

“시생이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오래도록 중전마마께서 자식을 낳지 못하시니 해괴한 말들이 흘러다녔습니다. 후궁에 있는 누군가가 회임하여 아드님을 순산하면 그 분이 장차 조선을 치리하게 될 것이라구요. 그러나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중전마마가 아직 젊고 전하의 용체 활력이 넘치신데 그런 걱정은 아직 이르지요.”

“지금 궁안엔 전하의 피를 받은 사내가 없단 말인가?”

“아직은 없습니다. 내명부의 숙의 문씨가 두 분 옹주마마를 순산했지만 그게 중전마마의 걱정거리는 아니지요. 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은 아들입니다. 왕자님이지요. 어느 누구라도 아드님을 회임하면 그 분을 조선의 제왕으로 삼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보면 중전마마 입장에선 가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요.”

장율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탐색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바, 상감을 오래도록 보필한 공이 이공수 내관에게 있다 들었네. 그렇다보니 벼슬이 종2품 상선에 이르렀고···. 이걸 중전마마 쪽에서 보면 원수와 같지 않았을까? 궁 안이니 중전마마께서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기가 쉬웠을 테고. 어떤가?”

“글쎄요, 생각으로야 가능한 일이겠으나···, 그리하자면 많은 사람을 속여야 하고 회유하거나 매수해야 합니다. 재물 또한 적지 않을 것이며 나중에 탈이 날 수도 있음을 무시할 수 없지요. 장순검님께서 그리 말하시니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은 자경전에 계시는 대비마마께서 각별히 총애하는 나인이 있긴 있습니다. 요근래 상감께서 그쪽으로 자주 가신다는 말씀이 나올 정도니 가볍게 볼 사이는 아니나 내가 생각하는 바론···.”

“뭔가?”

“아, 아닙니다. 괜히 해본 말입니다.”

“어허, 이 사람 왜 이러나. 하고 싶은 말을 아니하면 몸에 병이 되는 것은 차치하고 장차 추내관이 경위원에 올 일이 생긴다 그 말이야.”

“예에?”

“그러니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아는 바 있으면 내게 귀띔하게.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닌가. 사실 상선(尙膳)이라는 종2품 자리에 올랐지만 누가 알아주기나 하던가. 궁안의 꽃들이나 제 욕심 채우려 아양을 떨 뿐이지. 아니 그런가?”

“···.”

“어허, 이 사람 좀 보게. 어서 말을 하래두.”

추인한은 얼굴을 바짝 숙인 채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눈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실은 아홉 달 전 상감께서 미행(微行)을 나가셨답니다. 무감과 이내관을 대동하고 성문을 나섰는데 어느덧 걸음이 다방골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곤욕을 치르는 사람을 보고 이내관이 안타까운 마음에 끼어든 모양입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그 자는 점을 치는 복자(卜者)인데 음식 값을 치르지 못해 곤욕을 당한 모양입니다. 대금을 이내관이 치러주자 점쟁이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랍니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음식을 먹고 가격을 치르지 않으면 ‘용을 만나고 봉을 아우를 이’를 만날 수 있다는 점괘였는데, 자신이 작은 소란을 일으켰는데 별일 없으니 아무래도 점괘를 잘못 푼 것 같다고 돌아가더랍니다. 그 점쟁이가 가면서 준 게 바로 ‘전(前)’ 자 였어요.”

“앞 전?”

“그렇습니다. 문가에서 점쟁이가 뒤를 돌아보며 하는 말이, ‘만약 어디를 가고 싶으면 지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면 인연을 얻을 것’이라 했답니다.”

“인연을 얻었소?”

“글쎄요···. 굳이 인연이라 할 것까진 없지만 돌아오던 길에 이내관은 늙은 아비를 부양하는 설희(雪姬)라는 계집아이를 만났답니다. 점쟁이의 말이 생각나 그 처자에게, 만약 무슨 일이 있거나 오갈 곳이 없으면 운니동(雲泥洞)에 사는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답니다.”

추인한은 머뭇거리며 다음 얘기를 우물거렸다.

“그 뒷 얘기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상감께서 추내관의 집에서 자고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미행을 나갔다가 육신이 곤고해 잠시 쉰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만 궁 안엔 야릇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어요. 상감이 만난 처녀는 궁인이 아니었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몸이 둘도 없는 ‘호녀(好女)’였다는 소문이었어요. 이런 여인을 사랑하면 사내는 장수할 수 있고 두 사람이 관계하면 할수록 수명을 누리고 복록을 쌓아갈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후 알게 된 일이지만 ‘전(前)’은 이내관의 승승장구를 나타내는 글자였습니다. 즉, 이 글자엔 꽃(花)과 달(月)이 있고 이로움(利)까지 있었습니다. 만약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일에 불(煎)을 얻어 바짝 졸이면 되고, 학문하는 선비라면 ‘미인의 힘을 빌려 어떤 일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었는데, 그런 그가 목이 졸린 사체로 발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