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시오, 판관. 날 모욕하지 마시오. 난 세상 명리도 부귀광영도 싫소. 미실이 한때는 나의 내자였지만 대왕의 품에 들어갔으니 이젠 내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잊어야 할 사람이오. 내가 월성에 왔다 태후마마도 뵙지 않고 돌아간 것은 이제부터 궁 안의 일을 잊어야 할 때로 보았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없었소. 그런 내가 무엇 때문에 미실 낭주를 살해하려 하겠소.”

판관은 비로소 자신의 심중을 다 헤아렸는지 전군을 향해 가볍게 허릴 조아렸다. 그것은 취조관의 신분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댕견의 먹이를 주는 또출이의 증언이 있었고 모든 상황이 태후전(太后殿)의 소행으로 굳어지고 있으니 더 이상 파고드는 건 무의미한 일 같았다. 전군을 만나기 전, 지소태후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지 않은가.

“자넬 어사대 판관으로 추천한 것은 주상이 아니라 대리청정을 맡은 나였네. 내가 아무리 여인이라지만 월성엔 아직도 흔들리지 않은 뿌리가 있네. 모르는 이들은 아주 뿌리까지 뽑혔다고 할지 모르나 해묵은 힘은 보거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네. 해서 말이네만···.”

태후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것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것임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자네에게 어떤 걸 권하거나 꾸며놓은 일을 처리해 달라고 싶지 않네. 세상 이치는 그른 것에서 시작해 그 마지막은 항상 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걸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그런 것은 아니지. 그렇다고 내 말이 다 옳다는 건 아니네. 판관이 생각할 때 나의 주장이 잘못 됐다면 자네의 주장대로 주상께 고하라 그 말이네. 혹여 나를 생각해 다른 마음이 있다면 그건 판관의 내일을 망칠지도 모르는 일이네.”

머리가 아팠다. 어떤 일이건 그 일을 처리할 때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사대 판관들은 고구마 줄기를 찾듯 흐름의 맥을 찾아 일을 처리해왔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런 정도였지만 지소태후를 상대할 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후는 결코 권하지 않고 상대방이 알아서 처리하길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태후가 이용하는 북문을 출입해 또출이가 들어왔고 댕견의 먹이를 주려는 이를 택한 게 태후전각의 약사라면 이번 일이 누구의 손에서 풀려나왔는지는 불을 보듯 훤하다. 그러나 골치 아픈 건 태후가 일을 꾸몄다면 역모에 해당한다. 세종 전군을 내세우기 위해 태자를 죽였다면 아무리 상감의 어머니지만 목숨을 구할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만에 하나 태후가 일을 꾸미지 않았거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할 상황이 펼쳐진다면 칼날은 방향을 틀어 자신의 목줄기 위에 떨어질 것이니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 있겠는가?

“판관은 무슨 생각이 그리 깊은고? 이곳에 온 것은 혐의가 내게 있어 찾아온 것이 아닌고?”

“아, 아니옵니다, 마마. 소인은 대왕마마의 명을 받들어 사건 당시의 혐의점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태자마마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는 부분을 파헤치고 있나이다. 태후마마께서도 태자마마의 죽음에 대해 남기실 말씀이 있사오면 소인에게 한마디 들려주십시오.”

“이보시오, 판관.”

“예에, 마마.”

“나는 지는 햅니다. 태자처럼 육신이 팔팔한 나이도 아니고 급히 처리해야할 숙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궁안 사람들은 세종 전군이 주상의 뒤를 이어 보위를 이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지만, 그 아이는 부귀와 광영을 초개처럼 여기고 있어요.”

“아, 예에.”

“그런 전군에게 한때는 마음이 쏠리고 기대하는 바가 컸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사람에겐 남들이 모르는 저마다의 밥그릇이 있어요. 이 세상은 그것만큼 분복을 갖고 살아갑니다.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뜻은 만백성을 다스리거나 병사들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서책을 가까이 하여 학문을 높이는 것이랍니다. 그것 외엔 다른 뜻이 없어요. 주상도 전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압니다. 아끼니까 풍류주를 시켰겠지요.”

“아, 예에.”

“나는 미실에 대해서만은 미움을 거둘 수 없어요. 아주 요망한 계집이야. 내가 마음에서 지웠다 해도 그 아이는 우환을 일으키는 요물이요. 전군의 사랑을 받는 중에 대왕의 마음을 훔쳤으니 이게 간단한 일이오?”

“마마께선 그 점을 아셨습니까?”

“태자와 사는 아이가 내 전각에 사람을 보내 알리긴 했지만 그걸 대수롭게 여기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터졌으니 그 동안 꼬옥꼭 감춰 둔 부분들이 터지겠지요. 이보시오, 판관. 내가 미실 그 아이를 미워하는 건 사실이오. 그 계집을 죽이려고 댕견의 주인을 약사에게 명해 데려온 것도 사실이오. 그러나 그 요망한 계집이 태자까지 손에 넣고 장난치는 줄은 금시초문이오.”

“하오면···.”

“판관이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주상을 불러 따지겠소. 그 요망한 것이 언제부터 태자를 끼고 놀았는지를 내가 조사해 보겠소. 아하, 그렇구만. 주상이 남도에 있을 때 태자가 부자(附子) 소동을 일으킨 것은 뜻이 있었어요. 판관은 그걸 조사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