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이 난 초기 단계에 누구보다 놀란 건 미실이지만 그녀는 진흥왕이 손수 사사(四四)라는 약사를 그곳에 머무르게 하자 사도왕후는 그를 불러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를 저울질하여 상대의 됨됨이를 헤아리기에 여념 없었다.

“내가 들으니 너는 설씨 집안의 하인(家奴)으로 들어와 설씨들이 월성에 차고 넘치는 분복을 받을 수 있게 온 힘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동안은 지소태후 입김이 거세 어느 누구도 그 세를 꺾지 못했으나 이제 대왕의 연치가 서른을 넘었으니 수렴청정을 거둔 것이다. 해서 너에게 묻겠다. 죽어가는 세도를 쥐겠느냐, 살아있는 권력을 움켜잡으려느냐?”

“왕후마마, 소인은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지 못하겠단 말이냐?”

“그러하옵나다.”

“네가 보다시피 지금까지는 대왕의 나이 어려 태후가 섭정을 해도 그것을 지켜 볼 따름이었다. 만월성에 남도(南桃)를 만들어 말과 행동이 잎서는 군신들을 모두 치맛자락으로 덮은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지소태후가 신국(神國)을 꿈꾸며 만들었던 신라가 대왕의 손으로 건너왔으니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묻는 것이다.”

사사(四四). 이것이 그의 이름이고 지소태후에게 목숨을 내놓고 충성한 결과로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더구나 태후의 측근만이 볼 수 있는 서책들을 본 탓에 의학(醫學)에 깊이 빠져 이젠 약사(藥師)로서 전연 손색이 없었다.

월성엔 태후의 측근을 지키는 설씨 집안의 약사가 있고 진흥왕과 사도왕후 처소에도 있었다. 이들은 처소에 묻혀 자내며 잔병이 침입하는 걸 막는 게 주요 업무지만 사사(四四)는 여인네의 속 뜨거운 짓거리를 부채질하는 것보다 ‘비밀의궤(秘密儀軌)’라는 금단의 궤짝에 관심이 있었다.

사사가 그녀의 수중에 들어왔어도 비밀궤짝만은 가까이 못하게 했다. 그래서 사사는 자고 나면 괜히 그 안에 자신이 모르는 그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이쪽저쪽으로 머릴 굴리며 궁금증에 허우적거렸다. 지소태후는 그랬었다.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다. 집안의 가장 어른만이 볼 수 있는 게 있고 부리는 하인도 볼 수 있는 게 있다. 그런 것처럼 ‘비밀궤짝’이라 부르는 저 물건은 나의 명을 받지 않고 열어보았다간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것이 궁에 들어온 지 이레인가 되었을 때 들은 말이지만, 어엿 십여 년이 훌쩍 지나가 이젠 그런 물건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는가 싶었지만 그것은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아예 비밀의궤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왕후의 채근이 다시 떨어졌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아직도 태후의 치세가 연장되리라 믿느냐. 그런 것이냐?”

“아니옵니다, 왕후마마. 태후마마께오선 연치가 이미 예순이 넘은 상황인데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겠나이까. 소인이 나라의 평안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궁에 들어왔으나 비록 번잡스런 일이 있었어도 크나큰 소란은 없었던 탓에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지내왔을 뿐입니다.”

“내 다시 묻겠다. 네가 보기에 태후의 수(壽)가 어느 때까지 간다고 믿느냐. 아직도 몇 십년 남았다고 보느냐, 아니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세월이냐?”

“소인의 생각엔···.”

사도왕후가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요요롭게 빛나는 게 여간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섬��한 칼날처럼 다가오지 않았지만 조용하게 떨어지는 마디마디의 말 속엔 송곳 끝처럼 예리한 그 무엇이 있었다. 사사는 그 짧은 동안에 태후를 배반하지 않고 사도왕후의 미움을 피할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왕후마마, <사기(史記)> ‘회음후편(淮陰侯篇)’에 결견폐요(桀犬吠堯)란 말이 있나이다. 주지하다시피 걸왕의 개가 요왕을 보고 짖는다는 뜻입니다. 마마, 한(漢)나라 초기에 괴통(蒯通)이란 모사가 자신이 섬기는 한신을 위해 했던 말입니다. 신하된 자, 개나 말처럼 온 정성을 다 바치지요. 그런 점에서 상대가 아무리 훌륭해도 주인에게 해를 입히면 주인을 위해 짖게 됩니다. 그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주인이 아니면 어느 누구건 짖기에 그렇습니다. 당시 괴통이란 모사는 한신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 뜻을 묻는 게 아니냐?”

“왕후마마, 천하의 모든 사람이 마마와 반대 되는 생각을 가진다면 모두 죽이시겠습니까?”

“그건 아니다.”

“소인도 그러하옵니다. 세도가 지는 해와 같다하여 태후마마를 떠날 수는 없으나 왕후마마를 도울 수 있는 시기가 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 역시 한 가지만 약조하거라. 장차 미실 낭주가 어려움에 처하거든 낭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것만이 네가 살 길이다. 네가 그럴 생각이라면 잠시 보명궁에 머물며 사태를 정확히 헤아리거라.”

▲비밀의궤(秘密儀軌) ; 왕실의 귀중한 기록을 보관해 놓은 궤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