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출이가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보명궁엔 그를 따르는 수하들이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대왕이 외방(外方)의 소란스런 보고로 남당에서 자리를 뜨지 못한 사이, 신라금(新羅琴)을 울리며 미실이 퍼뜨린 풍랑가를 부르는 설원랑(薛原郞)을 보명궁에 불러 은은한 음률세계에 빠져들었다. 구리지의 용양신을 지낸 설성(薛成)의 후손으로 6세 풍류주 세종 전군의 ‘부제’였다. 두 번째 서열인 셈이다.

세종 전군이 미실의 호출을 받고 월성에 왔을 때 우륵에게 춤을 배운 자미소(子美召)는 그의 피리소리를 크게 칭찬하며 미실을 만나라고 청을 넣었다. 자미소는 신라 6부의 하나인 설씨(薛氏)들의 집성촌에 몸 담았다가 가야가 망한 후 우륵(于勒)이 안착한 충주 땅으로 가 춤을 배운 상태였다. 보명궁 한쪽에 그녀의 친구 묘화(妙花)가 있음을 기화로 우연히 미실을 만난 게 인연이 되어 설원랑을 소개한 것이다.

이 날이 마침 보름날이라 한가위가 한 달이 남았어도 달빛은 휘황하리만큼 고왔고 들뜬 풀벌레 울음소리가 가뜩이나 운치 있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빈청(賓廳)에서 손님을 맞이한 미실은 튼실한 체격의 설원랑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대가 부제라 들었는데 세종 전군과 온 것이오.”

월성에 들어온 이유를 물었다. 설원랑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도미소에게 미실의 관심이 뭔지를 들은 적 있었다.

“이봐요, 설원랑. 옥진궁주의 손녀딸을 만나면 궁금히 여기는 것을 풀어줄 비책(秘策)이 있어야 해요. 미실 궁주는 후궁에 새주(璽主)인 데다 원화까지 떡상을 받았으니 화랑으로 출세하려면 미실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설원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라고 해서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명색이 사내다. 그가 웃고 말았지만 그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소리마디를 방사에 응용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인 것처럼 말할 수 없어  분위기를 살피는데 낯선 피리 소리가 삐익 삑 들려왔다. 소리를 듣는 미실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동륜태자가 울리는 신호음이었기 때문이다.

태자는 이번 보름밤에 자신이 보명궁에 들를 것이니 대왕이 납시었으면 알려달라는 신호음이었다. 태자와 비슷한 연배였지만 설원랑의 피리 소리를 듣는 순간 미실은 무척 호감을 느낀 상태였다.

음악이란 게 뭔가. 언어다. 자신의 마음에 담긴 언어를 표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공감하기도 하고 때론 울부짖음 속에 탄식도 있다. 설원랑의 피리 소리는 울부짖음이나 탄식이 아니라 강물처럼 흐르는 고요함이다. 그 잔잔함 속엔 소리마디가 맑음도 있어 좋았다.

그런데 분위기를 깬 것이다. 동륜태자의 피리 솜씨가 머릿속에 잔잔히 퍼져나가던 연꽃향이 발산되는 듯한 분위기를 깬 것이다. 아랫것들은 주인의 마음이 어쩐지를 알기에 방법을 권했다.

“화답을 하오리까?”

화답은 대꾸다. 대왕이 이곳에 납시었다면 길게 피리를 부는 것으로 태자는 돌아갈 수밖에 없다. 대왕은 만인지상이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리도 한 번 부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설원랑은 그게 아니다. 화랑도의 부제지만 그는 남자일 뿐이다. 다시 피리소리가 들렸다. 댓귀가 없으니 다시 물은 것이리라.

아랫것들이 채근하듯 문지방에 서 있었지만 미실에게선 답변이 없었다. 아니 어떤 태도도 나타내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는지요?”

미실은 잠깐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두라. 내버려 두면 알아서 할 것이다.”

미실로서는 눈앞에 있는 설원랑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 없었다. 한때 사다함(斯多含)도 모셨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아, 이 사람은 진짜 화랑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는 새에 중얼거렸었다. 그것은 죽은 사다함을 연모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에 나가면 악기 대신 창검을 잡았을 설원랑의 모습을 떠올리는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삑삑거리는 피리 소리가 조각낸 것이다.

“어찌 해야 하는지요?”

“내버려 두라지 않느냐.”

미실의 말소리가 떨어지는 것과 함께 댕견의 힘찬 울음소리가 귓청을 찢었다.

“우왕! 크르릉!”

사납게 날뛰는 듯한 소리 속에 ‘으억, 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정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다가왔다. 그곳엔 열이 오른 댕견이 무언가를 맹렬하게 물어듣고 있었다.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면서 미실은 비명을 질렀다. 댕견이 물어뜯는 건 담을 넘어 들어 온 동륜태자였다. 이미 태자는 목줄기를 물어뜯겨 명이 끊긴 채였고 군데군데 찢겨진 살점들이 주위에 널브러졌다.

미실이 밖에 나와 비명을 지르자 댕견은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미실을 향해 맹렬히 달려왔다. 시비(侍婢)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지만 설원랑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댕견의 목을 내려치고 있었다.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 오음

▲설원(薛原) ; 신라 6부의 한 성씨. 설성의 아들로 설화랑이라고도 한다.

▲천보노는 한 번 쏘면 천 걸음이 나가는 신라의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