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마마가 미실을 부른 것은 백 번을 생각해도 좋은 일을 기대할 수는 없다. 대왕을 가까이 하면서도 흉중엔 섬뜩한 생각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헤아린단 말인가.”

세종 전군은 온 몸의 힘이 쏘옥 빠지는 걸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각 지소태후는 왕후에게 분풀이를 못한 것들을 미실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너는 나와는 달리 네 할미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 대원신통이다. 미색이 반반한 그 시절부터 나와는 앙숙이었으니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너를 불러들여 좋은 자리를 마련한 것은 나와 네 할미의 은원을 생각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내 아들 세종 전군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 내 며느리로 생각했는데 너는 어찌 나를 배신하여 사도왕후의 숨통을 열어줬느냐?”

“···.”

“어찌 대답이 없느냐?”

“태후마마, 소녀는 왕실에 들어와 태후마마로부터 분에 넘치는 복을 받았나이다. 또한 서방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탓에 분에 넘치는 광영이라 생각합니다. 지난날 서방님께서 소녀에게 준 것은 밀교(密敎)의 수법자가 전한 축혈(蓄血)이라는 체위였습니다. 그것은 대왕마마처럼 조루(早漏)로 고생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일 뿐 건강한 사내에겐 아무 소용없는 물건이었나이다.”

“네가 생각하기엔, 세종 전군에게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마마.”

“그렇다면 내가 아무 쓸모없는 것을 너희 부부에게 주어 지니게 했다는 말이 아니냐. 그것 참 듣고 보니 참으로 맹랑한 아이로구나. 그러한 계산법으로 볼 때 너의 뱃속에 든 아이는 세종 전군의 핏줄이 아니렷다?”

“그러하옵니다.”

“누구 아이냐?”

“귀당비장을 지낸 사다함의 아입니다. 그 사람은 가야를 정벌하려 전장터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중이라 합니다.”

“오호, 그래. 그렇다면 잘 되었구나. 용감무쌍한 사다함의 아이를 뱃속에 담았으니 얼마나 든든할꼬. 오라, 그랬기에 내가 지니고 있으란 말을 바람결로 들었구만. 좋다. 네가 용감하게 사도왕후를 어려움에서 건져냈으니 설령 일이 잘못된들 후회는 없으렷다!”

“···.”

“내가 그 물건을 너희 부부에게 줄 때 무어라 했느냐. 부부가 함께 세상을 사는 길엔 어려움이 수 없이 따를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나의 당부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 약속을 어기고 비방을 사도왕후에게 주었다. 나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사는 길을 찾아준 사도왕후를 미워하는 내 마음이 가라앉을 수 없으니 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어쩌겠느냐, 네가 왕실에 남고 싶으면 품에 지닌 환도(還刀)로 얼굴을 그어 사죄하라. 그것이 이곳에 있을 유일한 방법이다. 그게 싫다면 나의 처소에서 나간 즉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거라.”

“태후마마, 그 같은 일을 어찌···.”

“네가 내 눈에 띄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너는 나를 만나서도 안 되고 내 아들 세종 전군과 만나는 것을 불허한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네 맘껏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내가 이사부(異斯夫) 장군에게 파발을 띄워 사다함을 불러 올렸으니 마음에 둔 정인(情人)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게야. 오호호호호!”

미실도 지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지요. 나가겠습니다. 태후마마 곁을 떠나겠지만 혹여 궁에 있더라도 미워하진 말아주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나가겠습니다.”

  ▸이사부(異斯夫) ; 가야정벌의 총사령관. 지소태후는 자신의 힘이 약해지자 그를 불러 씨를 받아 세종 전군을 생산했다.

▸용두형 격 ; 의식(儀式)에 사용하는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