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자신에게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없었으나 소록소록 내리는 빗발을 바라보자 왕궁으로 떠나올 때 가마 안에 던져 넣은 말들이 되살아났다.

“세상을 살다보면 따사로운 햇빛만 늘 비추는 건 아니다. 쏟아지는 빗발이 있는가 하면 한 방울의 비도 구경할 수 없는 쩍쩍 갈라지는 가뭄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폭풍우까지 몰아쳐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간다면 큰일 났다고 허둥대지 않겠느냐. 이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무리 위급하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사는 수’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 말만은 아닐 것이지만 미실은 자신과 사도왕후의 문제를 가만히 들춰보았다. 귀족의 피를 받고 태어나 왕실로 시집온 후 금쪽같은 왕자를 낳은 사도왕후지만 대원신통이라는 혈통이기 때문에 쫓겨나야 한다면 미실 자신은 어찌되는가?

사내들은 혼인하여 일정기간 함께 지내다 보면 진력을 느끼고 버거워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달콤함은 어느새 흔적만 남고 녹아버린 게 어찌 남자뿐이겠는가. 여자는 더욱 심하다. 그래도 참고 견디는 건 가정이라는 둥우리(巢)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이 점은 미실도 같은 생각이었다. 옥진 할머니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수(隋)나라를 세운 문제(文帝)의 부인 독고황후(獨孤皇后)의 사랑법에 대해 들려줬었다. 황제가 사랑을 다투는 연적에 손을 댄 경우라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거나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게 예사였다. 황후는 내명부 여인들을 모아놓고 일대 강설을 펼쳤다.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모양인데 그건 옳지 않은 일이야. 황후 신분이 아니라 해도 내가 그런 건 눈감아 줄 수 없지. 사내가 계집을 만나 만만한 여흥에 빠지는 건 조물주가 내린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어. 나는 손해날 흥정은 안하는 성미니까. 나를 속이고 황제의 속살을 만지작거리는 건 저승의 아래층에 오른 간덩이가 부푼 짓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 때문에 황후의 <내훈(內訓)>은 왕실뿐 아니라 여염집 마나님이 첩실을 다스리는 괜찮은 지침서로 이용되었다.

첫째, 사내와 계집은 한 사람으로써 족하다. 어찌된 셈인지 사내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여자는 한 번 혼인하면 다른 사내를 가까이 않는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첩을 둔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그것은 황후인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여인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것을 두고 본다는 건 도무지 내 생리에 맞지 않다.

둘째, 시집 간 여자가 본서방이 아닌 사내와 정을 통하면 집안을 망쳤다고 다시없는 대죄의 굴레를 씌워 때론 죽임을 당하거나 혹형을 받는다. 그런데도 사내들은 다른 곳에 계집을 두고 은밀히 쥐구멍(臭鼠)을 기웃거리는 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긴다. 언감생심 그런 사내는 집에서 내쫓기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셋째, 남편이란 작자들은 첩을 두기도 하고 홍등가 계집들에게 손을 내밀지만 어찌된 셈인지 얼굴이 반반한 미소년들에게도 손을 뻗친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아니 이만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내의 즐거움을 빼앗고 쓸개를 짓밟는 일이다. 궁 안에서 펼쳐진 어떤 연극을 보면 남색을 즐긴 사내가 염라대왕에게 엉덩이에 침을 맞는 벌을 받는데 그 정도 벌로는 어림없다. 은근짭짤한 그 물건은 계집 쪽에도 갖춰졌기 때문에 필요하면 이쪽에서도 제공할 수 있는 데 남색을 즐기는 걸 보면 우리 것보다 그쪽 물건에 특별한 맛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만 그건 웃기는 일이야.

넷째, 여인에겐 아이가 생기기에 바람을 피우면 싫든 좋든 열 달 후에 드러난다. 그러나 현장을 붙잡기 전에는 사내의 바람기를 잡을 수 없다.

다섯째, 사내의 연장이라는 게 자기 아내의 깊고 은밀한 곳에만 침입할 때만 활동을 하고 다른 계집을 만나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죽은 척 해야 하는데 어디 그런가. 얼굴이 반반하거나 눈꼬리가 어찌 처졌거나 말소리에 물기가 젖은 사람을 만나면 이건 어찌된 셈인지 필요 이상으로 용감해져서 퉁퉁 불거지는 것도 꼴볼견이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손오공이 휘두르는 여의봉처럼 단단해져 필요이상으로 좌충우돌 설치고 다니며 검붉은 대가리에 파란 힘줄까지 세워 가을 독사처럼 불끈거리는 게 꼭 동네깡패 힘자랑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매일 대하는 아내에게는 비실비실대다 나동그라지기 일쑤니 증말 웃겨. 대가리는 축 늘어뜨리고 목에도 허리에도 힘이 없는 것이 마치 비 맞은 솜처럼 젖어가지고는 어서 빨리 자기의 덤불 속으로만 도망치려 한다.

여섯째, 아내의 손으로 첩과 미소년을 몰아내면 그것으로 그만인가 하고 안심했다간 큰 코 다친다.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별 요사스러운 장난을 치고 야호(夜壺) 주둥이로 계집이 보물같이 여기는 그 장소를 대신하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죽부인(竹夫人)이나 탕파자(湯婆子)같은 물건까지 갖춰놓고 천한 잔재미를 즐기려 하지 않은가.

계집의 마음에 응어리를 만든 사내들의 행동이 대충 이런 것이지만 어느 것은 설령 봐줄 수 있고, 한 번 시집 왔으니 풀밭에 엎드린 자라처럼 그저 죽은 척 모르는 척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황후인 나의 처지로선 이 중 어느 항목도 양보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이 항목을 어겼다간 살아남지 못한다.

책장을 덮은 미실은 독고황후의 거칠 것 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떤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을 만지작거리며 지소태후 눈치만 살펴야 하는가. 세상을 뜬 옥진 할머니는 이런 경우 ‘법술(法術)’을 사용해 위기를 극복하는 게 짐승들의 지혜라고 가르쳤다.

“누구든 제 살붙이가 아깝지 않는 이가 있겠느냐. 네가 참아도 지소태후가 요망한 방법을 쓴다면 너는 거침없이 대적해 나가야 한다. 아직은 겨드랑이에 솜털밖에 돋지 않았다만 그렇다고 목이 졸려 죽어야 하는 암탉 신세는 되지 말아야 한다. 미실아, 대왕을 움직여라. 대왕을 움직이면 태후의 오만함을 물리칠 수 있다. 지금이야 말로 네게 준 법술을 써 먹을 시기다. 어서 움직여라!”

▸취서(臭鼠) ; 여인의 음문을 달리 부르는 말이라고 하나, 본래는 음문 위쪽의 5분의 1 지점을 가리킨다.

▸죽부인(竹夫人) ; 잠자리를 시원하게 하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도구

▸탕파자(湯婆子) ;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따뜻한 물을 넣은 잠자리를 돕는 기구

▸야호(夜壺) ; 입구의 폭이 좁은 요강

▸옥구의 용도는 중국의 여러 사서에 모습을 보인다. 신라인들은 중국인들이 잠자리에서 귀히 여기던 옥구를 사신을 통해 수입하여 성생활을 즐겼다. 장수를 누리고 싶은 욕심에 도가(道家)에서 제공한 이런 기구가 은밀히 애용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