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에 촉촉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레 앞으로 다가 온 단오절 행사를 뜻있게 보내려고 하늘의 신이 신라에 생명수를 뿌려준 것이라고 즐거워했다. 성행위를 묘사한 기우제를 올린 남도 원궁(園宮)은 나라의 오랜 근심을 단숨에 해갈시켜주는 효험을 보아선지 비가 추적거리는 데도 수줄과 암줄잡기의 춤사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만세, 만세! 태후마마 만세!”

“대왕마마, 만만세!”

“이왕 시작한 일이다! 똑바로 세워라, 세워!”

“세워라, 세워!”

“질러라, 질러!”

“질러라, 질러!”

남녀들은 손에 손을 잡고 원무(圓舞)를 추며 요염하게 몸을 흔들었다. 소식은 즉시 반월성으로 전해지고 기우제의 공을 세운 큰무당 모을지(毛乙支)가 내을신궁의 신녀(神女)로 정해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태후가 중신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기도하여 비를 내리게 한 것은 장차 왕실의 큰 변화를 예견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도왕후의 혈통이 대원신통이다보니 마음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변방으로 세종이 출전한 후여서 미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야의 병력을 가볍게 제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들은 강하고 억셌다. 전장터의 소식은 승전가가 날아들었지만 그건 조금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세종이 변방으로 떠난 뒤 홀로 남은 미실의 처소에 들른 지소태후는 남도로 행하던 걸음을 멈추고 말했었다.

“전군(殿君)의 방엔 아름다운 화병(花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그거구나. 여기에 일곱 가지로 옷을 갈아입는다는 수국(水菊)을 담으라 했는데 과연 그렇구만. 수국은 너무 눈부셔 ‘칠변화(七變花)’라고 하던가.”

“그러하옵니다, 마마.”

“꽃도 영락없이 사람의 마음이네. 주인의 마음에 따라 여러 변화를 일으키네. 나는 옥진 궁주의 손녀딸인 네가 입궁한 날부터 ‘칠변을 일으킨다’는 이슬차를 들지 않는다. 아니, 나를 따르는 진골정통은 이슬차를 들지 않아. 이곳에 와 보니 너희가 있어선지 수국이 하얗게 꽃을 피웠구나.”

“아, 예에.”

“미실 너를 보면 칠변화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의 가슴에 일곱 개의 구슬이 있다고 했는지 모르겠다만 수국이 현란하게 옷을 갈아입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수국을 의미하는 칠변화를 지소태후는 미실과 같다고 했다. 처음 필 때 연한 자주색인 수국은 곧 푸른색으로 변하고 그러다가 연분홍으로 변하여 색깔을 달리한다. 물론 그 무렵에는 알 수 없었으나 이 꽃에 이름을 붙인 네덜란드인 주카르느(Zuccarina)는 스물여덟 나이에 식물조사단 일원으로 일본에 왔다가 기생과 사랑에 빠진다. 기생 이름은 오타카(Otaka)였다.

사랑을 나누던 기생이 변심해 다른 사내에게 가버리자 가슴앓이를 하던 주카르느는 수국의 학명에 ‘오타카(Otaka)’를 넣어 변심한 애인을 만세에 전했다. 그것이 애인에 대한 보복인지 낭만의 기록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런 꽃, 변심하듯 자주 색깔이 바뀌는 수국이 어쩌면 미실과 그렇게 닮았는지를 지나치듯 말을 던지고 지소태후는 남도로 떠났다. 아들의 여인이지만 조금만 틈을 보여도 가차없이 내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태후가 나와 왕후마마를를 겨냥해 시위를 당기려는 것은 대원신통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야. 언제건  태후의 손짓에 쫓겨나야 한다면 그것을 운명으로 돌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분명, 이건 아니다. 아무 잘못 없이 쫓겨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궁 안의 어른인 왕후마마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면 결코 나에게도 이로운 건 없다. 이런 때를 대비해 할머니가 내게 준 비책(秘策)이 있으니 그걸 사용해봄직한 시기가 된 듯 싶은데···.’

내명부 깊숙이 웅크린 이을지에게 전군 처소의 비자(婢子)를 보내 보명궁(寶明宮) 동쪽 거처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취하고, 먼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 시각 후에 도모(道帽)를 쓴 이을지가 찾아와 상황의 어려움을 넌지시 꺼내들었다.

“자넨 지금 나서야 될 때가 아니네. 옥진 궁주께서 총애를 받으실 땐 여러 모양새로 명이 내렸어도 모두들 지극정성으로 따랐네. 그러나 지금은 왕실의 큰 어른인 지소태후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왕후마마는 잘못이 없어도 트집을 잡아 내치려드는 게 아니겠나. 왕후의 처지가 그렇다 하여 자네까지 곤란을 당할 건 없네. 자네는 나름대로 전군 마마를 잘 섬기고 태후의 명을 잘 받도록 하게.”

“그런 뜻이 아니라 소인의 말은···.”

이을지는 도대체 상대의 얘긴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미실이 궁에 들어온 지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그걸 상의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깜짝 놀랄 얘기를 터뜨렸다.

“더구나 자네에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 있네. 자네가 왕가의 핏줄이라도 잉태하기 전엔 모든 걸 비밀로 해달라고 했으나, 자네 할머니 옥진 궁주는 이레 전 세상을 떠났으니 자네를 도와줄 사람은 없네.”

“예에?”

“인명은 하늘에 있다지만 어제까지 덕담을 나누던 궁주께서 세상을 떠나니 나 역시 번거로운 세상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네. 나도 예순이 다 됐으니 살만큼은 살았다고 봐야겠지. 이 나이가 되면 세상의 쓸데없는 욕심은 버리기 마련이지. 나야 내명부에서 비(妃) 마마를 시중드는 처지지만 너는 혈기가 방장하고 미색이 뛰어나니 어느 누군들 색공 드리지 못하겠느냐. 나 역시 얼마 후엔 왕실을 떠날 것이니 네 할머니가 준 <명당경(明堂經)>은 네가 가져가거라.”

   ▸도원(桃園) ; 남도의 도화원을 말함
   ▸명당경(明堂經) ; 이 당시엔 좋은 혈(穴)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묻힌 땅에 장차 일어날 변화를 적은 내용이다.
   ▸모을지(毛乙支) ; 진흥왕 때 내을신궁(柰乙神宮)을 다스리던 신녀

  ▸우는 의식(儀式)에 사용하는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