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기름으로 등불을 켠 도화원은 그야말로 흐늘거리는 불빛이 색정(色情)의 도가니를 연출했다. 나라의 가장 어른인 지소태후 명으로 무작위의 합환령(合歡令)이 떨어졌으니 어느 누구도 멈칫대며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없었다.

거칠 게 없다보니 유녀들은 나이든 대신들의 허리를 둘러감고 놓아줄 것을 몰랐다. 예전의 만월궁 후당 연못엔 연꽃이 만개해 대신들이 풍류놀이를 즐길 때는 연화주(蓮花酒) 흥취에 젖었다. 만개하기 직전의 연꽃에 신라주(新羅酒)를 붓고 일주일 남짓 밀봉해 두면 꽃잎 사이로 술기운이 배어 혀끝에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내명부의 양온서(釀醞署)에서는 잔칫날 여유있게 마실 수 있는 연화주를 넉넉히 준비했다. 술기가 부드러워 법주 내음이 강한 이 술은 나중에 도수가 높은 신라주와 쌍벽을 이뤄 발전한다.

술이 이것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지소태후는 이 날의 연회를 위해 술과 약초를 혼합해 난망주(難忘酒)를 준비시켰고 좌중의 남녀들은 술의 묘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도수가 높지 않고 은은히 취하는 데다 주정(酒精)엔 강장비약이 섞여 있으니 몸이 뜨거워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보니 곳곳의 기둥엔 요망한 시구(詩句)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붙어 있었다.

원래 입은 있지만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네

수많은 머리털 속에 안긴 둥근 상처 구멍

일체의 중생이 미혹돼 빠져드는 그곳

모든 부처가 나온 바로 그 문이라네

(元來有口更無言 / 百億毛頭癰丸痕 / 一切衆生迷途所 / 十方諸佛出身門)

여인의 은밀한 부위를 노래하는 ‘여음시(女陰詩)’였다. 얄짤지근한 분위기를 타고 놀이가 온종일 이어지자 소문은 유녀들의 혓바람을 타고 월성으로 날아들었다. 서악(西岳)이라는 선도산(仙桃山) 어림에 안간힘하듯 해가 걸렸으니 대왕이 집무를 보는 남당(南堂)엔 학문을 좋아하는 학사(學士)와 감여(堪輿)가 식을 줄 모르는 하늘의 섭리에 장탄식을 터뜨리고 있었다.

“대왕마마, 단오(端午)가 이레도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밖은 무덥기 그지없나이다. 곡물이 세 해나 말라 죽으니 백성들은 끼니를 이을 수 없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벗겨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나이다. 마마께선 방책을 마련하시어 백성들을 구하심이 옳은 일이라 보여집니다.”

“지금 서라벌의 식수(食水)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건 과인보다 감여가 잘 알 것이오. 왕궁을 정하는 도읍풍수(都邑風水)에서는 물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저 멀리 고구려 쪽의 얘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생명수가 없으니 당연히 기근이 들 터이고 자양분이 부족한 초목은 말라 죽습니다. 이럴 때 신라의 풍수를 맡은 감여의 방책은 무엇인지를 과인이 묻는 것입니다.”

도읍 풍수를 보면 고구려는 평양이 행주형(行舟形)이다. 나라 곳곳에 그 터가 있지만 대표적인 건 평양(平壤)이다. 특히 이곳은 수대국(水大局)의 형상이니 행주형은 우물을 파지 않는 게 특이하다. 즉, 지형을 살피면 배가 떠나는 형국이므로 쇠닻을 준비하여 매어놓는 게 ‘소응’으로 알려져 있다. 행주형의 땅에 사는 사람들은 우물을 파는 걸 금기시한다. 그것은 배의 밑바닥에 구멍 뚫는 일이기에 배가 가라앉는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물을 파선 안 되므로 평양에 사는 이들은 가까운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 먹으며 배가 떠나는 걸 막기 위해 연광정(鍊光亭) 밑바닥에 쇠닻을 가라앉혀 놓았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떤가? 이에 대해 이씨 성을 쓰는 감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왕마마, 도읍지와 왕기가 서린 땅은 별개로 볼 수 있나이다. 왕기는 장차 군왕이 될 자가 출현하는 장소이옵고 도읍지는 왕이 된 자가 국업(國業)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신라는 만월형의 성곽을 지니고 있었으나 흙벽으로 이루어져 곳곳이 무너지고 급기야 이곳 반월성을 지어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백제가 만월의 형상을 띤 채 날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 신라는 초생달 형상이므로 빈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오나 마마, 만월은 차면 이지러지고 초승달은 점점 소생할 것이니 신라의 장차는 밝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태후마마께서 만월성에 도화원을 만들고 연회를 여는 것은 만월의 기운을 빌어 비를 내리게 할 것으로 보이오니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근심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가만, 가만···. 이 감여의 얘길 들으니 의문이 일어나오. 과인이 듣기엔 태후께서 유녀들을 집단으로 불러 향락을 베푼다는 데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란 게요?”

“그것은 마마를 위해 비를 부르는 행동입니다. 하오니 조금만 기다려 보옵소서. 좋은 소식이 날아들 것입니다.”

이감여의 주장처럼 가뜩이나 만월성 쪽에 신경을 쓰던 진흥왕에게, 무당을 집단으로 교육시키는 ‘모하리’ 마을의 촌장(村長)에게 연락이 왔다. 스물네 명의 무녀(巫女)가 명을 받고 만월성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훈련을 마치면 그녀들은 신녀(神女)가 되어 내을신궁(柰乙神宮)에 머물며 귀신들을 접촉할 것인데 무슨 이유로 만월성에 갔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을신궁(柰乙神宮) ; 신라의 시조를 제사지내던 신궁

▸감여(堪輿) ; 풍수사

▸난망주(難忘酒) ; 복잡한 세상 일을 잊게하는 술. 미약(媚藥) 성분이 들어 있다.

▸양온서(釀醞署) ; 술 만드는 부서

▸소응 : 감응이 뚜렷이 나타남

▸여인이 사용하는 사슴장식의 하나.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