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정벌의 출정군이 돌아오고 있었다. 신라 백성들은 누구랄 것 없이 대대적으로 환영 했지만 오후 늦게부터 음습해진 날씨처럼 선봉에 선 사다함은 개선장군이라기보다 낯빛이 잔뜩 굳어 결코  공을 세운 장수의 기상이 아니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장군의 어머니께서 무관랑 봉사랑에게 미묘한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평소 두 분께서는 은밀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무관랑이 공을 세우는 걸 못 마땅히 여긴 장수들이 있다 보니 쓸데없는 오해가 생길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간 장수에게 무운 승전을 비는 서찰은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고선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무관랑은 충주 지방에 일이 있어 이틀 전 급히 떠났지 않은가.

사다함의 머릿속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성에 들어와 승전의 소식을 상감께 고하고 물러나오는데 그의 눈은 한 곳에 붙박여 떨어질 줄 몰랐다. 자신과 사랑을 나눈 미실이 세종과 나란히 서있지 않는가.

자신이 도성을 떠난 사이 미실은 다른 사내의 품으로 날아가 버린 게 분명했다. 비몽사몽간이다 보니 대왕의 치하도 사다함에겐 공허하게 들렸다. 더구나 그 날, 잔뜩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꽂이 비수처럼 회돌이치며 밀려들었다.

“이봐요 무관랑, 어찌 이다지 서두르세요. 사다함이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갑자기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난 내 아들보다 그대가 걱정이 돼 한잠도 이룰 수 없었어요.”

“이거 놓으세요 금진낭. 사다함을 평소 측근에서 섬겼는데 그대와 정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십니까. 늪 속에 발을 담군 사내가 한 발을 뽑기 전에 또 다른 발이 빠져드는 걸 알고 있으면서···, 속수무책으로 손을 못 쓴 것은 모두가 내 죕니다. 지금이라도 풍월주 곁으로 달려가 허물을 고하는 게 내가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이 몸을 부르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무관랑. 공이 떠나면 나는 어찌 살라구요. 그러지 말고 날 좀 안아줘요. 내 몸은 공을 향해 뜨겁게 불타고 있어요.”

후다닥 뛰어나가는 무관랑의 발짝 소리와 절박하게 매달리는 어머니의 애잔한 한숨 소리를 사다함은 고통스럽게 듣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어머니는 뜨거운 몸을 주체치 못해 한숨을 쏟아냈지만 사다함은 허무와 절망 속에서 자지러지고 있었다.

무관랑은 어린 나이에 화랑의 무리 속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본시 화랑은 화랑, 낭두, 낭도의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화랑의 하부 집단인 낭두(郎頭)엔 일곱 개 등급이 있었는데 무관랑은 나이 스물셋에 대도(大徒)로 들어와 사다함을 만날 때까지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신분을 유지했다. 조금만 신분이 좋았어도 용맹한 전공 덕분에 대화랑(大花郞)은 문제없었으나 그의 승전의 용맹함은 신분이 넉넉한 자들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었고 그것이 무관랑을 더욱 비참하게 몰아갔다. 특히 도무소(都務召)라는 친구가 자신들의 윗전에 행하는 비굴한 행동을 보면서 그는 화랑의 신분을 박차고 나올 생각을 했었다.

무관랑은 풍월주의 고문 역할을 했던 상선(上仙) 수조공(守祚公)에게 비굴한 행동을 보이던 도무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이 반반한 도무소의 부인이 임신했을 때 산 꿩을 예물로 삼아 아내를 수조공에게 보낸 것은 자식을 낳으면 어떻게든 마복자를 삼아 출세의 대열에 끼어들고 싶은 욕심이었다.

게다가 옥진궁주는 어떤가? 세종 전군이 가볍게 생각한 옥진궁주(玉珍宮主)는 나이가 들었어도 결코 쉽게 다룰 여인이 아니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손녀딸을 품안에 꼬옥 안은 새처럼 교육시키며 ‘사내를 죽이는 법’부터 가르쳐왔었다.

“우리 가문은 왕실의 권좌를 이어받는 핏줄은 아니나 품계의 두 번째 서열인 대원신통(大元神統)이다. 늘 앞서 나가는 진골정통(眞骨正統)으로 인해 항상 그림자 속에 숨은 듯 지내왔지만 사내를 다스리는 것만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련한 회상에 잠긴 듯 사르르 눈을 감았다. 자신의 힘으로 왕가의 핏줄을 바꿀 계기가 있었다. 법흥왕이 그녀를 총애하여 삼맥종(三麥宗)이라 부르는 태자를 폐위시킬 준비를 했었다. 그때 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은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 나섰다.

“중원에 그런 말이 있답니다. 연못의 고기를 낚지 않고 물을 모두 퍼내 고기를 잡는다면 낚시질하는 것보다야 훨씬 많이 잡을 수 있으며 산중의 짐승들을 사냥하지 않고 불을 지른다면 모든 짐승들을 다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가 돌아오면 그곳에 고기와 짐승들이 살았다는 것만을 회상할 것입니다. 궁주께서 지금 생각을 접지 않으시면 일시적으론 마음이 편할지 모르나 나중엔 큰 재앙을 받게 됩니다.”

옥진 궁주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삼맥종이 왕위를 받을 수 있도록 법흥왕을 움직였었다. 삼맥종이라 부르는 진흥왕. 그의 지나간 공과를 인정한 탓인지 왕비 사도부인은 보명궁의 사용을 허락했다. 이제껏 서라벌 곳곳을 탐색했던 옥진궁주가 손녀딸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짝(配)’을 찾아주는 일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던지는 유일한 위안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내가 궁안에 출입했던 것은 손녀딸을 위한 걸음이었다. 며칠전 삼월삼짇날 행사에서 무예겨루기의 장원을 한 젊은이가 어쩐지 내 마음에 쏘옥 들었다. 사다함(斯多含)이란 젊은이가 열여섯이라 했으니 이보다 적당할 수 없는 일이다.’

혼사는 갑자기 이뤄졌다. 일반인이라면 사가(私家)에서 치룰 일이지만 화랑을 이끄는 5세 풍월주다 보니 임시변통으로 관직을 하사받았다. 무관 계급의 하나인 귀당(貴幢)으로 궁궐 문을 지키는 자리였으나 열여섯 나이에 그럴 정도면 전도가 유망한 것은 불을 보듯 환했다.

그의 부친은 구리지(仇利知)로 끈끈한 일화를 가진 인물이었다. 구리지. 이건 구린내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의 아비가 비처왕의 왕비를 은애해 화장실에 갈 때마다 뒤좇아 가길 여러 차례 되풀이 해 자식을 얻었다 하여 구리지라 불렀다.

구리지는 아름답기가 어머니를 닮았고 담력은 부친을 닮아 점점 자라서는 낭도와 무예를 좋아하였다. 그는 위화랑의 딸 금진낭주와 정을 통해 토함 · 색달 ·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의 나이 열두 살이 됐을 때 검술에 능했으며 화랑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을 옥진궁주가 직접 확인하고 사내다운 사내로 인정해 손녀 사윗감으로  정했다. 때맞춰 지소태후에게서 ‘사다함의 짝’으로 정했다는 연락이 왔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레 전인 삼월 삼짇날의 무예겨루기에서 장원한 사다함(斯多含)을 무관 계급의 하나인 귀당(貴幢)으로 삼아 궁궐 문을 관장케 했을 당시 자신을 찾아온 옥진궁주의 청을 지소태후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오호, 그래요. 궁주의 손녀딸이 이제 열넷이라구요. 혼기가 꽉 찼습니다. 구리지(仇利知)의 아들 사다함을 손녀 사윗감으로 낙점 했다니 뛰어난 혜안이십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곳이라 불편할 것 같아 내가 보수를 명했으니 청조가 들어오면 불편한 점은 없을 것입니다.”

맘껏 여유를 부리는 지소태후의 아량이 왠지 섬뜩하게 느껴진 것이다. 아들 삼맥종(三麥宗)이 보위에 올라 25년이 흐른 동안 섭정(攝政)이란 달콤한 사탕을 놓지 않으려는 지소태후고 보니 말과 행동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마음에 들면 왕족이든 대신이든 잠자리에 불러 자신의 밭에 씨를 뿌리게 하고 그것이 곱게 잉태되도록 자신을 엄호했다. 이것은 사내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으로 정치를 하는 어려움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고비를 헤쳐나간 것이다. 그랬기에 진흥왕은 나이가 서른둘일 때까지 사도태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옥진궁주는 정성을 다해 사례하고 나왔으나 마음자리엔 불안의 우물이 뭉텅하게 패어 있었다. 그렇기에 청조가 보명궁으로 가기 전날 밤 옥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왕실의 기둥을 생산한 색공지신(色供之臣)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굽힐 필요는 없다. 내가 한때 사도왕후의 어머니 보도부인과 겨룬 것을 마음에 새기고 지금껏 앙심을 품고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만, 궁에 들어간 너에게 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로구나.”

항상 손 안의 보석처럼 주위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손녀딸 청조(靑鳥). 묘도의 자궁에서 미끄러지며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어둔 밤을 적시는 야명주같은 홍보석이었다.

‘이 아이는 대원신통의 흐름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 보기만 해도 즐거움이 살아 돋고 만지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 아이! 가지를 찾아 날아다니는 청조(靑鳥)였다가 주인을 찾으면  ‘아름다운 방’이라 하리라. 미실(美室)! 그렇다, 이 아이는 미실이다.’

▸청조(靑鳥) ; 미실의 아명(兒名). 이후로도 이름을 사용했으나 사다함이 죽은 후 완전히 미실(美室)이란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삼맥종(三麥宗) ; 진흥왕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