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은 이 부분에 흥미를 느꼈다. 자신이 보았던 중원의 주부락(周部落)이 연합군을 형성해 상왕조를 멸망시킨 걸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4대기서의 하나인 봉신방(封神榜)으로 자리잡았다. 하던 얘길 마무리 지으려면 끝자락을 다시 들춰본다. 상왕조의 멸망에 따른 양쪽 군사의 흘린 피는 이른바 시산혈해(屍山血海)다.

백성들의 애매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곧장 조가(朝歌)로 진격한 희발의 병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자수신의 시신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미 재가 된 자수신의 몸에 화살을 세 발이나 쏘았고 칼질을 세 번 하더니 그것도 부족해 도끼로 목을 베어 백기에 꽂아 높은 장대 끝에 매달았다.

천하 만민의 공분을 선 자수신의 폭정. 그의 폭정은 6백년 전 사이계의 폭정과 똑같았다. 미실은 그것이 사실일 수 있으나 ‘포락지형(炮烙之刑)’에 대해선 훗날 누군가의 손을 타 조작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역사왜곡에 이골이 난 건 중원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일본의 역사학자처럼 억지춘향식으로 엉성하게 조각치지는 않는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거의 진실에 가깝게 우리 민족을 흔든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가장 먼저 나타나야 될 게 고대왕조의 폭정과 폭군이었고 중원인들의 순전(純全)한 복종심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뒷부분에 집어넣어 역사를 변조할 실마리가 나타나는 거고 어느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선전을 업으로 하는 중원의 사학자들. 그들은 6백년 전의 일을 깜빡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의도로 그리했는지 자수신도 포락을 행했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은 쉬운 게 아니다. 칼을 질못 휘두르면 자신의 발가락도 짤려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달기. 그녀에 대한 얘기는 중국인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또한 헬레네의 얘기 역시 서양인들은 모두 잘 안다. 그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인 기원전 12세기에 태어났지만 결과에 있어선  전연 딴판이었다.

헬레네는 남편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갔지만 소달기는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3백년 후인 기원전 9세기에 하마사시(荷馬史詩)가 발표됐다. 또한 2천6백년 후에 소달기를 주제로 한 허중림(許仲琳)의 <소설 봉신방>이 발표됐다. ‘하마사시’는 세계적으로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았지만 <소설 봉신방>은 문학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시매희의 죽음은 일개 개인의 죽음이었지만 헬레네가 불러 온 회오리는 당시의 서방 사람들이 ‘세계대전’이 되리라고 예측했다. 그리하여 희랍의 신화를 모두 들춰내 구름과 안개를 타고 내려와 참전케 했다.

헬레네가 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묘사된 반면 <소설 봉신방>에서 소달기는 사람이 아닌 요정으로 묘사되었다. 만약 소달기가 그렇게 고약했다면 이런 묘사법을 시용한 건 그녀의 죄악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소설 봉신방>이 발표된 시점을 놓고 볼 때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송나라 황제 조구(趙構)는 재상 진회(秦檜)와 결탁해 민족의 영웅 악비(岳飛)를 죽였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악비의 전생을 거대한 붕새(鵬鳥)로 나타내며 이런 해설을 붙였다.

<악비의 전생은 거대한 붕새다. 그랬기 때문에 물고기를 비롯해 자라, 새우, 조개 등을 너무 많이 해쳤다. 물고기나 새우, 자라, 조개 등이 금제국(金帝國)의 대원수 완안올술(完顔兀述) 등 등으로 ‘생이 바뀌어(轉生)’ 복수하러 왔다.>

문학가에겐 창작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단수가 낮은 이런 작품들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식상케 할 뿐이다.

소달기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4백년 후 또 하나의 이상한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것은 주왕조(周王朝) 때 포사(褒姒)에 관한 얘기지만 그건 나중에 다뤄야 할 얘기다.

미실은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그녀가 신라 왕실에 들어왔을 때 세종 전군이 보여준 <비밀의궤(秘密儀軌)를 생각해 봤다. 그것은 왕실에 전해 내려오는 ‘비밀의 궤짝’이다. 신라 왕실이 형성되기 전 그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 본체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여 그들이 신라왕실에 들어오게 됐는가?

한편으로는 지소태후가 만들었다는 신국(神國)은 우연히 부속물로 만든 성격만을 갖는가? 또한 <무왕벌주(武王伐紂)>를 굳이 앞세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주부락이 일어섰다는 것을 강조한 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일들의 실마리를 미실은 <비밀의 궤짝>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그게 어떤 의도로 씌어진 내용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게 신라의 건국연대, 더 나아가선 그들의 조상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미실로서는 그게 더 궁금했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비밀의 궤짝>을 다시 봐야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고 신라의 국왕을 움직일만한 힘이 있어야했다.

‘내가 왕실에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미실이 머뭇거린 사이 뭔가를 미적거리던 사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이걸 잠시 보시지요.”

사사는 자신의 품속에서 이상한 모양의 물건을 내놓았다.

▲봉신방(封神榜) ; 중국의 4대 기서로 알려진 책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 만화로 발간되면서 이름자에 변화가 왔다. 허중림(許仲琳)이 <소설 봉신방>을 발표할 때의 봉신방은 지금과 같은 봉신방(封神榜)이 아니었고 봉신방(封神幇)으로 알려진 ‘봉신연의’였다. 그것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지금의 봉신방(封神榜)으로 고쳐졌다. 이상한 일이다.

▲비밀의궤 ; 신라왕실의 비밀을 다룬 궤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