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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타지] 늙은 엘프의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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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판타지가 인기죠?
문학에서의 판타지란 우리말로 바꾸면‘환상 이야기’ 정도일까요.
그러고 보면 바둑 또한 하나의 판타지라 해도 무방할 겁니다.
우리는 반상 위에서 얼마나 많은 환상과 환영, 그리고 초월과 꿈을 경험하고 사는지 …
그래서 한번 써 봤습니다. 이른바 ‘바둑판타지’.
짧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오로촌 여러분의 여름나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어쨌든 재미있어야 할 텐데요 …)
[바둑판타지] 늙은 엘프의 이야기 - 1
이것은 내가 만났던, 한 노인 엘프의 이야기이다.
노인 엘프의 모습을 보기란 참으로 어렵다. 꽤 경험이 풍부한 여행자라 해도 귀밑부터 가슴에 이르는 잿빛 수염을 기른 늙은 엘프를 만난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 희귀하다는 대머리 엘프 정도까지야 미치지 못하겠지만.(대머리 엘프를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갓 초보딱지를 뗀 신출내기 여행자의 신분으로 그런 엘프와 마주할 수 있었으니. 뿐이 아니다. 그는 내게 벤야민 잎으로 만든 연초까지 권해 주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모른다. 그때도 몰랐고, 당연히 지금도 모르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가 뭐라 가르쳐준 것도 같은데 워낙 장문인데다 발음이 어려워(엘프어였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선 한번 슬쩍 듣고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여행을 떠난 이후 경험하게 된 노인 엘프와의 첫 만남에 꽤 흥분한 상태였던 것이다.
「여행자신가? 잠시 다리나 쉬고 가시게.」
큼지막한 바위 위에 껑충 올라앉은 그의 모습은 뒤로 보이는 숲을 가로지르려는 여행자들을 위해 통행증을 발급해주는 늙은 관리처럼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엘프답지 않게 컬컬한 저음을 냈다. (역시 나이 탓일 것이다)
그는 대단히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바위 위에 새겨진 기기묘묘한 도형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오호! 저것이 바로 전설적인 엘프의 마법진?
기대감으로 다가가 보았지만 그것은 그저 평범한 바둑판일 뿐이었다. 깊게 암각된 바둑판 위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묘수풀이 하나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이마 위로 흐른 땀을 닦아냈다. 때는 6월의 오후. 여름의 초입이었다.
숲의 입구는 키가 훌쩍 큰 느릅나무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어디선가 짙은 눈선인장의 꽃 냄새가 났다. 근처 어딘가 군락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포도주가 든 가죽물통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뒤 그에게 건네자, 그가 받아 목젖이 울리도록 맛있게 마셨다. 그는 만족한 듯 손을 들어 수염에 묻은 포도주 방울을 문지르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향이 기막히군. 6014년산이지? 달콤하면서도 끝 맛에 적절한 알이 밴 것이 틀림없이 그 해의 포도로 담은 것이야.」
나는 말없이 되돌려 받은 물통을 거꾸로 들곤 꿀꺽꿀꺽 포도주를 목으로 넘겼다. 6014년은 포도의 작황이 좋아 품질 좋은 포도주를 많이 낸 해로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 해에 담은 대부분의 포도주는 왕궁이나 귀족들의 성에 납품이 되었고, 나와 같은 서민(나는 중산층이라고 주장하지만)들은 평생 가야 라벨 딱지 한 장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웬만한 주점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큰 도시에나 가야 한 두 병정도 갖춘 술집이 있을 정도였다.
이 포도주? 이건 어제 묵은 여관에서 사들고 온 것이다. 6014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맛도 향도 형편없어서, 물에 포도송이를 잠깐 담갔다 뺀 것을 포도주라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기뻤다. 나는 드디어 그냥 늙은 엘프도 아닌, 치매에 걸린 늙은 엘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숲에 사십니까? 어르신?」
「그렇지. 이 숲에 살았어. 물론 젊어서는 나도 자네처럼 대륙 곳곳을 떠돌며 모험과 낭만을 즐겼다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되니 시들해지더구먼. 그래서 고향인 이 숲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고 있지. 그게 그러니까 …」
노인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고자 애썼다.
「드레곤 에이젠슈타인이 세 번째 헤즐링 오와라마고스를 낳았던 해였지 아마? 안 그런가 쿰바라듐탄?」
 노인은 뒤에 서 있는, 자신 만큼이나 나이 먹어 보이는 느릅나무 한 그루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느릅나무는 「 … 」라는 대답을 보내왔다.
나는 노인의 말을 신뢰하는 대신, 매우 신중해 보이는(?) 노인의 친구 느릅나무 옹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했다.
「…」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어느덧 오후의 태양은 그 힘을 잃고 노란 오렌지 빛을 대지 위에 가득 뿌리며 하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줌 빠른 바람이 뺨을 스치곤, 후드드 숲을 향해 달아났다.
슬쩍 눈길을 돌려 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일과를 마친 늙은 청소부처럼, 평온하지만 스러질 듯 위태한 모습으로 바위 위에 새겨진 암각판 위의 묘수풀이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내가 쥐어 준 포도주 주머니는 그의 옆에 놓여져 주름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벌써 다 마셔버린 것이다!)
「자넨 올해 몇인가?」
처음엔 바위가 말을 건네 온 줄 알았다. 그런 정도로 침묵은 둘 사이에 익숙해져 있었고, 나 역시 대화에 별 다른 기대 없이 늘어져 가는 오후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나이를 그에게 말해 주었다. 사실 정확한 내 나이는 나도 모른다. 내 부모는 알고 있을까? 긴 전쟁을 겪은 6020년대의 아이들은 대개 그랬다. 나는 그나마 다행으로, 적어도 나를 키워 준 사원의 수녀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어찌 그 이름을 꿈엔들 잊으리오! 뿌드득!!)
「인간으로서도 아직 창창한 나이로구먼.」
그랬다. 그의 말이 옳다. 인간의 평균 수명으로 보아도 나는 아직 그 절반도 소비하지 못했다. 창창하다고까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장장(長長)한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난 이제 다 살았어. 이제 200년이나 더 살까 …」
물론 무한정에 가까운(그래도 수명은 있다) 엘프의 수명으로 보아 200년이면 ‘다 산 인생’임에 분명하다. 그래도, 고목처럼 다 쓰러져가는 이 노인네에겐 여전히 200년의 세월이 남은 것이다. 나는 위에 적힌 ‘장장(長長)’이란 표현에 가위표를 쫙쫙 긋고 싶어졌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네.」
노인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리칼, 수염을 꼭 빼닮은 잿빛 속에 봄 꽃술 같은 연두색이 섞인 기묘한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왼쪽 가장자리에 백태가 조금 낀 것을 제외하면, 목소리만큼이나 덜 쇠퇴한 눈이었다.
 「자넨 엘프의 인생에 대해 많이 들어봤겠지. 그 장구한 삶에 대해 말일세.」
「그에 비하면 인간의 삶이란 것은 하루살이 같을 테죠.」하고 내가 말했다.
「하루살이라 … 글쎄, 좋은 비유는 아닌 것 같군. 자넨 하루살이와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본 일이 있나?」
있을 리가 없다. 하루살이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전에 오리너구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을 것이다. 나는 오리너구리를 제법 좋아하는 것이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물론 우리의 하루가 아닐세. 그들에게 하루란 시간은 참으로 긴 삶이지. 난 하루살이와 점심을 같이 먹으며 얘기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그 친구 이름이 뭐더라 … 어이, 쿰바라듐탄! 자네 기억하고 있나? 왜 그 날개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브랜디를 곧잘 마시던 하루살이 친구 말일세.」
「…」
예의 쿰바라듐탄 옹은 여전히 신중했고, 노인 엘프는 다시금 내 쪽을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친구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어. 되는 일이 없었던 거지. 먹이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사랑에도 실패하고, 집세는 밀려 있고 … 아이는 자꾸만 늘어나고, 정말 최악이었단 말일세.」
「하루살이가 말인가요?」
「그렇지. 그 하루살이 … 그러니까 …」
<2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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